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남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맞는 6·25 악몽 같은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날이 오면 되살아 나는 아픔에 몸서리를 친다.
한국 최초의 여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예비역 상사 이인숙 할머니(79·수원시 장안구)는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며 “젊은 시절 목격한 전쟁은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 할머니는 1950년 6월 전쟁이 발생하자 대구에서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 이미 부산은 전국에서 모여든 피란민들로 먹을 것이 부족했고,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루에도 수십명이 굶어죽은 채 길가에 버려졌다.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나섰던 이 할머니는 먹을 것을 준다는 이유로 군에 지원했다. 최초의 여군 창설 공고를 보고 3천여명에 달하는 여성 지원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이들의 지원 이유는 ‘배고픔’이라는 단 한가지였다.
“그때는 먹여준다고 하면 남의 집 첩살이나 종살이 등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 할머니는 그해 7월부터 휴전이 맺어진 1953년까지를 꼬박 군에서 보내고 이후 2년을 더 있었다.
단 하루도 가족이 그립지 않은 때가 없었다.
1·4후퇴가 한창이던 1951년 1월, 한국군 최초로 서울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억은 어제일처럼 또렷하다.
온전한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로, 여기저기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한겨울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 맨살을 드러냈고, 군인들이 지날 때마다 먹을 것을 구걸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어떻게든 사는게 가장 중요했다”는 이 할머니는 말을 하는 내내 기억이 되살아 나는 듯 주름진 눈매가 파리하게 떨렸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냉랭해진 남북관계를 묻자 “그런 비극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며 “전쟁은 죽은 다음에도 잊혀지지 않는 상처”라고 전했다.
이 할머니는 그때의 기억으로 일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일생을 홀로 살아왔다.
지금도 6·25와 관련된 자료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할머니는 “제발이지 이런 아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그때의 실상을 정확히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cs@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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