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두부터 엄동설한이다. 재테크 시장 얘기다. 기름값 100달러 소식은 대설주의보의 예고편일 뿐이다. 하루에도 몇백 포인트씩 급등락하며 살얼음판인 홍콩 증시, 끝 모를 미국발 집값 하락의 한파, 20년 만의 고물가 냉기까지 곳곳이 수상한 기후다. 코스피지수도 잔뜩 움츠렸다. 새 정부 출범이나 내수회복 기대로 투심(投心) 온도계가 오를 법도 한데 영 무기력하다.
그러나 부자들은 이번에도 빨랐다. 두툼한 방한복 준비에 한창이다. 그들은 대체 어떻게 겨울나기를 할까. 중앙SUNDAY가 부자 1만1000여 명의 ‘투자 보따리’를 1년만에 다시 엿봤다. 재산 얘기엔 입을 다무는 부자들이 많아 그들의 재정자문관인 은행 프라이빗뱅커(PB)의 설문과 인터뷰에 토대를 뒀다. 서울 강남·강북·여의도·목동과 경기도 분당·일산에 있는 국민·우리·신한·하나·한국씨티은행의 40개 프라이빗뱅킹(PB)센터를 찾는 부자들의 고민과 투자전략을 소개한다.
이글루의 지혜
중소기업 사장인 이모(55)씨는 최근 해외펀드를 모조리 환매했다. 손에 쥔 돈은 28억원. 그러고선 3개월짜리 정기예금에 모두 밀어넣었다. 원래 그는 2년 전부터 중국·중남미·광업주·브릭스 같은 해외펀드에 투자하던 ‘펀드 마니아’였다. 총 금융자산의 80%를 묻어둘 정도였다. 평균 수익률은 20% 남짓으로 쏠쏠했다. 하지만 이 사장은 “시장을 어둡게 보는 전망이 잇따른 데다 마침 국내 금리가 오르자 미련 없이 갈아탔다”고 했다. 그는 예금 만기까지 몇 달간 시장을 관망하면서 슬슬 고수익 상품을 탐색할 작정이다. 국민은행 방배PB센터의 김재한 팀장은 “이씨처럼 수익금을 정리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다른 투자기회를 저울질하는 부자들이 늘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부자 4명 중 1명은 자산 보따리를 바꿀 궁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래픽 참조> 그러나 기계적인 상품교체는 아니었다. 에스키모처럼 이글루에서 잠시 강추위를 피한 뒤, 새 사냥감을 찾겠다는 계산이었다. 신한은행 압구정 PB센터의 금동석 팀장은 “거액 자산가들은 ‘학습효과’ 때문에 고수익엔 고위험이 따른다는 걸 직감한다”며 “특히 지금은 ‘위험’에 더 비중을 두면서 예금·단기상품으로 돌려 굴리려 한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일산(40%)에서 포트폴리오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가장 높았다. 지난해엔 강남 부자들이 가장 활발하게(4명 중 1명) 투자 보따리를 다시 쌌다. 국민은행 일산 PB센터의 정남태 팀장은 “파주·구파발 쪽의 신도시 개발로 수십억~100억원대의 토지보상금을 받은 부자들이 많아졌다”며 “이들이 처음엔 예금만 했으나 차츰 펀드투자 맛을 만끽하면서 수익률과 시장 변화에도 더욱 민감해진 것 같다”고 했다. 신흥부자들까지 가세할 정도로 ‘보따리 재편’과 ‘실탄 확보’가 부자들의 화두라는 얘기다.
부자들은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후폭풍이 부른 금융불안을 가장 두려운 악재로(66%) 꼽았다. 그동안 성찬을 베푼 중국도 긴축과 거품붕괴 우려 탓에 짐으로 여겼다. 반면 신흥시장의 잔치판이 이어지고, MB노믹스로 기업이익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악재에 묻히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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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속에서도 부자들이 앞으로 가장 늘리려는 자산은 ‘신흥시장 펀드’(64%)로 나타났다. 1~2년간 짭짤하게 수익을 만끽한 터라 쉽게 놓지 못하고 있다. 국내 펀드에 대한 눈길은 그 3분의 1 수준이었다.
특히 PB들이 부자들에게 입 모아 추천하는 방한복은 ‘EMEA 펀드’(39%)였다. 이머징유럽(Emerging Europe)·중동(Middle East)·아프리카(Africa)에 고루 투자하는 상품이다. 최근 위험분산을 앞세워 유행하는 퓨전형 펀드의 하나로 서브프라임 파고를 덜 타고 고유가 혜택이 기대된다는 점이 부각됐다. 미래에셋·피델리티 운용 등이 팔고 있다. 브릭스펀드(17%)와 아세안펀드(15%)도 부자들이 여전히 눈독 들이는 상품에 꼽혔다. 반면 중국 펀드에 대해선 ‘이제 배부르다’는 부자들이 많았다. 앞으로 줄이려는 자산 목록 3위에 올랐다.
물론 PB들이 EMEA 펀드를 권한다고 부자들이 덥석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이것도 학습효과가 크다. 지난해 초 PB창구에선 일본과 리츠 펀드를 유망하다며 내밀었으나 결과는 참패였기 때문이다.
주식은 금융주·증권주(30%)가 가장 러브콜을 받았다. 우리은행 대치역지점 정병민 PB팀장은 “부자들도 새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물론 1년 뒤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 효과가 얽히면서 증권·은행·보험주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눈에 띄는 건 건설주(14%)의 2위 입성이었다. 국민은행 아시아선수촌 PB센터의 이정걸 팀장은 “대운하 건설과 경기부양 기대감에서 오름세를 예상하는 부자들이 많다”고 했다. 중국 올림픽 수혜를 입을 전자제품 관련주, 소비재주를 꼽은 부자도 있었다.
부동산 꽁꽁, 채권은 해빙기
건설주가 조명받는 것처럼 부자들의 부동산 입질이 다시 활발해질지도 관심이다. 아직까진 찬바람이 분다. 부자들이 앞으로 줄이겠다는 자산 1위가 부동산(38%)이었기 때문이다.
신한은행 금동석 PB팀장은 “대형 빌딩에 대한 수요는 좀 있지만 주택이나 소규모 상가에는 관심이 적다”고 했다. 세후 수익률이 금융자산만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새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감도 구체적인 게 아니라 막연히 ‘지금보다 낫겠지’ 하는 정도라고 그는 전했다. 종부세만 해도 큰 줄기를 건드리긴 어려울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에선 새 정부 기대감이 강남·분당에서 낮았는데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는 해석이다.
지난해 초 떠들썩했던 해외 부동산도 썰렁하다. 이르면 올 상반기 투자한도(현재 300만 달러) 규제가 없어지고 구입절차도 간단해지지만 부자 반응은 미지근하다. 박찬호·박지성 선수의 자산관리를 맡은 우리은행 투체어스 강남센터의 박승안 PB팀장은 “해외 주택은 직접 관리하기 쉽지 않고, 서브프라임 불똥까지 겹쳐 애물단지가 됐다”고 했다.
대신 그는 “부자 고객들이 토로하는 큰 고민은 유동성 확보”라며 “채권투자를 적극 권하는데 반응이 좋다”고 했다. 매매차익이 아니라 만기수익률을 노리면, 지금처럼 채권금리가 올라갈 때(채권값 하락) 투자할 경우 안전한 실탄확보는 물론 연 5%대 중반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참모들의 작전지도
“너무 잘 알아서 힘들어요.” 지난해 재테크 부흥기를 거친 부자들의 안목과 지식이 더 만만치 않아졌다며 한 PB가 던진 푸념이다. 온갖 채널을 총동원해 동물적 돈감각을 다진 것이다. PB들의 작전지도도 그 채널의 하나다.
올해엔 ‘분할매수·정기예금·눈높이 낮추기’등이 PB들이 마련한 전술의 화두였다. 하나은행 목동지점 김영훈 PB는 올해는 변동성 확대가 예상되는 만큼 3~5회씩 돈을 나눠 넣는 원칙을 고수하라고 권한다. 우리은행 종로4가 지점의 정성학 PB팀장도 “고객에게 6개월 단위의 자산 재구성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방배 PB센터 김재한 팀장은 “쉬어가는 차원에서 3개월짜리 정기예금 등을 권한다”고 했다. PB팀장들이 권하는 평균 기대수익률은 20%대를 넘지 못했다.
김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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