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선거 방불케하는 시공사 선정 선거
최근 시공사가 선정된 서울의 한 재개발 지구. 시공사가 선정되는 ‘결전의 날’, 수주경쟁에 뛰어든 두 건설사는 조합원들의 막판 표심을 잡기
위해 정치 선거를 방불케 하는 선거전을 펼쳤다.
거리 곳곳에는 두 건설사의 대형 현수막과 깃발들이 걸려있고 10~20명씩 짝을
이룬 각 건설사 모니터 요원들은 거리를 지나는 조합원들에게 ‘한 표’를 호소했다. 좁은 마을 도로에는 건설사 모델하우스까지 조합원들을
싣고 가기 위한 대형 버스가 수시로 들락거렸다. 각 건설사가 대여한 대형 콜밴들도 시공사 선정을 위한 주민 총회가 열리는 장소까지 조합원들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수주 경쟁에 뛰어든 한 건설사의 사업소에는 조합원들에게 채 돌리지 못한 한과세트가 쌓여 있었다. 직원들은
이 회사를 지지하는 조합원들에게 “투표장에 가서 바람몰이 잘 해 주시고 회의가 편파적으로 흐르면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끊어 달라”고 열심히
독려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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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사진=연합뉴스] |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금품 살포 등 부작용도 빚어지고 있다. 이 지역의 한 주민은 “두 건설사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식기세트 프라이팬 홍삼음료세트
전기주전자 등을 보여줬다. 이 주민은 “이 정도는 약과다. 주민들 대부분이 뷔페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받았고 한 건설사는 지역 산악회에 물품을
대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온천 관광을 시켜줬다는 소문도 들었다”고 전했다. 이 주민은 “건설사 홍보 설명을 들으러 가면 현금 7만원을 준다는
소문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주민은 “건설사가 홍보를 위해 수십 억이 넘는 돈을 썼다고 하더라”는 풍문도 전한다.
상대
건설사에 대한 비방전도 뜨겁다. 한 건설사의 사무실에서는 ‘A사 지지자들에게 총회가 연기됐다고 전화가 오는데 이는 A사 지지자들의 총회 참석을
저지하기 위한 계략에 불과합니다. 예정대로 총회는 개최됩니다’, ‘A사 모델하우스 방문과 사업설명회가 취소됐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서울시
재개발 연합회에서 여론 조사를 한다며 A사 지지자들에게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서면결의를 유도하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으니 속지 마십시오’ 등
조합원들의 주의를 당부하는 글이 적힌 인쇄물도 발견됐다. 건설사 직원은 이에 대해 “실제 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주민들에게 주의를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투표 용지에 일련번호가 있어 누가 어떤 건설사를 찍었는지 나중에 다 밝혀진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오는 주민도 있었다. 이에 직원은 “상대측의 비방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재개발 돈잔치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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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사진=연합뉴스] |
재개발 시공사 선정 때마다 벌어지는 건설사의 돈잔치 관행이 최근 다시 불붙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지역 뿐 아니라 재개발이 예정돼 있는
서울 강북의 30여개 지역에서 이 같은 과당 수주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개발이익환수제 시행으로
재건축 시장은 얼어붙은 반면, 3월 2일 개정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정법) 11조로 인해 재개발 시장은 탄력을 받게 됐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개정된 도정법은 “주택재건축사업조합은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후 시공사를 선정해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
‘재건축’ 사업의 시공사 선정 시기를 사업시행인가 이후로 못박고 있다. 반면 ‘재개발’의 시공사 선정 시기에 대한 지침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재개발추진위 및 건설사들은 종전에 사업 승인 이후에 가능했던 재개발 사업 시공사 선정이 사업 시행 초기 단계인 재개발
추진위원회 단계에서 가능하게 된 것으로 이 조항을 해석하고 있다. 건설교통부 측 역시 이런 해석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건교부 측
관계자는 “시공사 선정 문제 때문에 일부 재개발 사업 지역에서 공사 진척이 늦어지는 등 문제점이 발견돼 이 같은 법 개정이 이뤄진 것으로
안다”며 재개발 시공사 선정 시기에 대해 관용적 입장을 표했다.
건교부 측은 그러나 “원칙적으로 조합 설립 후 조합의 승인을 받은
시공사가 법적인 지위를 가진다. 추진위 단계에서 결정된 시공사에 대한 권리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추진위 단계에서 선정된 사업자는 주민들의
합의 사항일 뿐 법적 효력은 없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시공사 변경 등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논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총회를 통해 선정된 시공사의 지위를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어 결과적으로는 사업자 선정 시기가 크게 앞당겨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시공사 선정이 앞당겨지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조합이 운영 등에 필요한 돈을 시공사측으로부터 조기에 끌어올 수 있어 사업
추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시공사들의 입찰 수주 경쟁에 과열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건설사들은 주장하고
있다.
건설사, 구조적인 문제일 뿐 건설사 잘못
아니다
입찰에 참여한 건설사 측은 이 같은 과당 경쟁이 재개발 절차 변경에 따른 구조적 모순 이라고 항변한다.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도정법
개정에 따라 시공사 선정 시기가 빨라져 과당 홍보 경쟁이 더욱 심해졌다”고 말했다. 시공사 선정이 추진위 단계에서 이루어지면서 건설사의 홍보
기간 역시 사업 초기 짧은 시간으로 한정돼 금품 배포 등 부적절한 홍보 수단이 등장한다는 논리다.
다시 말해 종전처럼 재개발 사업
중단 단계인 사업시행 인가 후 시공사가 선정되면 경쟁 사업자들은 사업 초기부터 시공사 선정 시기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물의 특장점을 홍보할
수 있다. 하지만 법 개정과 함께 시공사 선정이 빨라지면서 이 같이 시간을 요하는 홍보활동이 어려워지면서 금품 살포 등 효과 빠른 홍보 방법이
이용된다는 것이다.
앞서 예로든 재개발 구역의 시공사 선정 역시 사업시행 미인가 상태인 추진위 단계에서 이루어졌다. 이 구역은
주민총회 전 1주일만을 건설사의 공식 홍보 기간으로 정했다. 물론 건설사들의 과당 경쟁으로 홍보 기간 훨씬 전부터 홍보가 이루어졌지만 홍보
기간이 과거에 비해 짧아진 것은 사실이다.
건설사 측은 또 시공사 선정에서 요구하는 찬성 조합원들의 비율이 낮아진 것도 과당 경쟁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업 시행 인가 이후 조합원 총회를 통해 시공사가 선정되는 경우 조합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추진위 단계에서는 조합원의 절반 이상만 찬성해도 시공사로 선정될 수 있다.
찬성 비율이 낮아지면서 건설사들이 건축물, 사업비용 등
재개발과 직접 연관이 있는 사항들의 홍보를 통해 다수 조합원들의 중지를 모으려는 시도 대신, 짧은 시간 안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50%의
조합원들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오려는 데만 혈안이라는 설명이다.
건설사 측은 또 “경쟁사가 준 금품을 거론하며 상품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주민들이 있다. 이런 조합원들 때문에 건설사도 어쩔 수 없다”며 경쟁 구도를 악용하는 일부 주민들의 행태를 꼬집기도
했다.
과당경쟁은 건설사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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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사진=연합뉴스] |
전문가들은 그러나 시공사의 이 같은 주장이 변명이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제도의 허점 때문이라기보다 재개발 사업에 걸린 막대한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입찰 경쟁사들이 자발적으로 과당 경쟁에 참여한다는 지적이다. 재개발 사업으로 발생하는 이득에 비하면 홍보비용이 그다지 큰돈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과도한 홍보비는 결국 공사비용으로 추가돼 주민들이 부담하기 때문에 입찰에 성공하기만
하면 건설사들이 손해 볼 일은 없다고 건축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김헌동 경실련 아파트값거품빼기운동본부장은 “홍보 기간이 짧아서 경쟁이
심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홍보 기간이 길면 그 기간 내내 과당 경쟁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재개발 사업이 보장하는 건설사의 이득이 존재하는
한 부당 홍보 경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단장은 이어 “향응 제공은 시공사 입찰의 공정한 선거 절차가 아니다”며
“시정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건설사가 경쟁사 탓, 주민 탓만 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민간 기업 참여해 부당 이익에 철저
과세해야
경실련 측은 재개발 사업 시 발생하는 이익을 제대로 환수하지 않는 한 건설사의 과당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개발
이익에 대한 세금 납부 책임이 있는 조합측조차 세부담을 덜기 위해 시공사의 허위 사업 계획서를 눈감아 주는 경우가 있어 이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경실련은 이를 위해 “미국의 CM(컨스트럭션 매니지먼트)과 같이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사업 관리업자가
개발사업 전반에 참여해 시공사의 탈법이나 조합의 전횡을 철저히 감리하고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건설 개발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절차를 통해 재개발 및 재건축 사업 시 발생하는 이익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대해 공정히 과세해 건설사와 조합의 막대한 이익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성화된 부동산 문제의 근절을 위해선 땅 투기로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는 사례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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