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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의 시작-단군과 고조선 - 10월 3일 개천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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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의 시작-단군과 고조선 - 10월 3일 개천절의 의미

 

 


 

화랑(본인)이 직접만든 반크 영문 홍보포스터-고조선(위) 단군(아래)

 

단군왕검

 

고조선의 건국 시조

 

단군에 대한 전승은 13세기에 나온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

이래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 단군이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시조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단군의 계보 등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하늘 신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熊)이 지상으로 강림하여

웅녀와의 사이에서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여 1500년 동안 통치하다가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제왕운기』는 환웅의 손녀와 박달나무 신[檀樹神]이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으며,

단군은 1038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또 권근(權近, 1352~1409)의 <응제시(應製詩)>에서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했으며, 단군의 재위 기간이 1000년이 넘는다고 한 것은 실은 단군의 자손이 대대로 이어가면서 통치한 햇수를 합산한 것이라 했다.

 
이밖에 환웅과 백호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전승,

환웅이 곰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여우와 혼인하여 기자(箕子)를 낳았다는 전승도 있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의 계보를 천신과 연결하고, 재위 기간도 1500년가량인 데다가 마지막에도 산신으로 좌정했다고 하여 단군을 신격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응제시>는 단군의 조상 계보에 침묵하고 재위 연수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등

단군의 신화적 면모를 최소화하면서 역사적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듯 단군에 관한 전승은 다양하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전승이, 특히 『삼국유사』의 전승이 단군신화의 원형에 가까울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응제시>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단군을 재해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응제시> 전승이 각종 문헌에 채택되는 등

단군에 대한 표준적인 전승이 되었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단군의 역사적 위상은 확고해졌다.

국가 차원에서 단군을 시조로서 제사했으며,

단군의 무덤을 찾음으로써 단군이 산신이 아닌 인간임을 확실히 했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 나온 역사서에서는 단군의 치적이 언급됨으로써

단군의 역사성은 더욱 강조되고, 마침내 한말에는 단군 인식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즉 단군은 민족의 시조이고, 우리 민족은 다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봉건적 신분제 사회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노비가 같은 조상, 한 핏줄이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말에 오면서 외세의 침입 앞에 민족의 단결이 필요했고, 민족의 단결을 위해서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바로 이러한 요청에 부응한 것이 단군이었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뭉쳐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말에는 단기 사용(1905), 개천절 기념(1909),

단군교 창립(1909) 등 단군과 관련한 각종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의 시조라는 인식을 비롯하여 현재 남북한이 공유하고 있는

단군 이해의 틀은 한말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이다.


단군에 대한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단군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전통도 꾸준히 이어졌다. ‘단군’이란 말의 의미는 ‘무당’으로 풀이되며, 따라서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 사제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군 자신이 신격화되기도 했다. 이것은 고조선의 조상신이었음은 물론 산신으로 좌정됐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군을 숭배하는 전통은 고조선 이래로 계속되었다고 보이지만, 이것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10세기경부터 황해도 구월산에는 단군을 비롯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환인·환웅을 함께 모시는 삼성당(三聖堂)이 있었고, 이곳은 영험 있는 기우처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황해도 지방에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그 원인을 삼성당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으로 돌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군 숭배의 전통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19세기말~20세기 초 평안도 지역의 김염백(金廉伯)이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백봉(白峰) 등의 단군운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앙운동은 마침내 1909년 대종교의 출현을 가져왔다.


단군신앙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온다. 한 흐름은 신종교로, 다른 하나는 민간신앙 내지 무속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한국의 신종교 가운데 단군을 모시는 교단은 30여 개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단군을 주신으로 받드는 곳도 있지만,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모시는 종단도 있다. 한편 민간신앙에서 단군은 마을신앙의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일제시대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상남도 함양과 강원도 양양 지방에서 동제 때 단군을 모셨다. 오늘날에는 서울 동빙고동 부군당에서 단군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여러 신과 함께 모시고 있다.


무속에서도 단군을 받들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무당내력(巫黨來歷)』이나 『무당성주기도도(巫黨城主祈禱圖)』에서는 무속의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있다. 즉 무속은 단군에서 비롯한 신성한 민족 전통이며, 제석거리·별성거리·대거리·성조거리 등이 모두 단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무속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국문화계에서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단으로 볼 수 있다. 현전 무가에서도 단군이 사설에 등장한다. 영일 지방 골맥이굿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제든 무속이든 간에 단군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출처 :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2009.11.12, 국립민속박물관

 

http://isplus.joinsmsn.com/article/169/9559169.html?cloc

차길진의 갓모닝-홍산문화(단군)


 

 

단군설화

 

우리 민족의 시조이고 고조선의 창업왕인 단군에 관한 신화.

 

내용은 7개의 이야기토막으로 엮어져 있다.

 

 ① 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삼대에 걸친 가계.

②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 지금의 백두산)으로 내려오는 것.

③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된 일.

④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한 것.

 ⑤ 그리고 이 여인, 곧 웅녀(熊女)가 사람의 몸으로 현신한 환웅과 혼인한 것.

⑥ 그 부부가 낳은 아기를 이름지어 단군왕검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 것.

⑦ 그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산에 숨어 산신이 된 것 등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지하고 있지만,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와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다.

실제로 ①에서 ③까지는 별로 다를 바 없으나, ④와 ⑤ 사이에서 크게 달라진다.

 

즉, ≪삼국유사≫의 웅녀가 사라지고 그 대신 환웅의 손녀가 등장한다. 환웅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갖추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한다.

이어 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했고,

그가 조선의 지경에 의지해서 왕이 되었다고 ≪제왕운기≫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의 뒤를 이은 부계의 3대인 데 비해,

≪제왕운기≫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계로서는

 4대째에 속하는 여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바람의 신[風神], 비의 신[雨神], 구름신[雲神]등을 거느리고는 곡식과 목숨과 질병과 형벌제도와 선악의 구별 등을 다스리면서 인간세상의 삼백예순 일들을 갈무리하였다.”고 하는 기록대로라면 환웅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이른바 ‘문화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조선의 최대영토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

 

 

고조선과 청동기 시대

 

 

참성단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산정에 있는 단.

 

사적 제136호. 단군성조가 366가지에 이르는 나라 다스린 공을 세우면서 아울러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보본(報本:생겨나거나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아니하고 그 은혜를 갚음)의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전국체전 때에는 이 제천단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리고, 특히 개천절에는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제천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민족 제1의 성적(聖蹟)으로, 마니산 제천단(摩尼山祭天壇)이라고도 한다.

참성단에 관한 기록은 고려 때의 문헌 여러 곳에서 이미 나타난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이 분이 단군이다. ……제천단을 쌓고(강화도 마니산에 있음.) 삼랑성(三郎城)을 쌓으시다(성이 강화 전등산에 있고

세 아들을 보내어 쌓았기 때문에 삼랑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수산집 修山集≫의 <동사 東史>에는 “제천단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으니,

단군이 혈구(穴口:강화의 옛이름)의 바다와 마니산 언덕에 성을 돌리어 쌓고

단을 만들어서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단은 높이가 17척인데 돌로 쌓아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위의 네모는 각 변이

 6자 6치요 아래는 둘레가 60자이다. 혹자에 의하면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神明)의 집이 된다.

러므로 제터를 닦아 한얼님께 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제단은

반드시 수중산(水中山)에 만드는 것이요, 위가 네모나고

아래가 둥근 것은 하늘과 땅의 뜻을 세운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이 제천단에 관한 본래의 연혁을 짐작하게 된다.

또한, ≪문헌비고≫에는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校書郎) 경유(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의 복조(福祚)를 늘게 하리라.’

함에 명령하여 이궁(離宮)을 그 산 남쪽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639년(인조 17)에 개수축(改修築)하였으며, 1700년(숙종 26)에 또 개수축하여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동녘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강도(江都)가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가 되고, 강도 수백리 전체를 둘러서 마니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지낸 곳이라 하니,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또한 많이 기울어져서……

선두포별장(船頭浦別將) 김덕하(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승 신묵(愼默)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 만에 일을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참성단이라는 명칭이 붙은 내력과 여러 번 고쳐 쌓은 일을 알게 되며, 제천단에 대한 선인들의 뜻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고조선(古朝鮮)

 

기원전 2333~기원전108년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한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무진년)에 아사달 또는 평양에서 단군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한다. 이때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한 단군조선과 이후의 위만조선을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다.

그러나 현재 일반적으로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왕검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며, 앞의 古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은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일대의 청동기는 기원전 15세기 정도가 상한으로, 이에 따라 고조선의 실질적인 성립 연대를

기원전 12 ~ 10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며,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조선(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하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전조선과 후조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로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으며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을 한역한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8조법'이라는 법률이 정해져 있었다. 이 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수단이었다. 그와 함께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계급 사회로서, 사유 재산을 중히 여겼으며, 응보주의(應報主義)에 따른 형법을 지녔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그 중에서 3개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

모두들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서 음란하고 편벽된 행위를 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삼국 시대의 역사가 일연이 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따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인간 세상을 다스리길 원해, 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신시라 했다.

태백산에 주를 달아 묘향산이라고 했다.

이후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한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평양에 도읍하여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1500년을 다스렸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은나라에서 기자(箕子)가 동래하여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神)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유무와 기자조선의 성격 그리고 기자의 혈통 등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사기

《사기》(史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위만조선의 역사를 고조선의 역사에 편입하는 학자들도 있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고조선의 봉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한사군에 대해서도 기록하였으나, 한사군의 구성 조차 밝히지 않고 있어,

후대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기타 자료

'태원 선우씨'의 족보인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와 허목(許穆)의 《동사(東史)》에 따르면 선우씨는 기자조선의 48세의 왕과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마한에 간 뒤의 일인) 마한의 9세의 왕을 지냈다고 하고,

<청장관전서> 에는 기자조선의 41세 왕과 8세의 왕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기자조선을 기술하지 않고 있고,

단군조선이 2096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규원사화》의 1195년과 901년의 차이가 난다.

 

출처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C%A1%B0%EC%84%A0)

 

 

 

대종교

 

천신교기 혹은 천기 일명 원방각

http://obangwon.blog.me/90148021218

 

한민족(韓民族)의 시조인 단군(擅君)을 섬기는 한국 고유의 종교이다.

대종(大宗)이란 ‘천신’의 뜻으로 대(大)자는 천(天)을 뜻하여 우리말로 ‘한’이란 뜻이요,

종(宗)은 신인(神人)의 복합어(複合語)로 우리말의 ‘검’(神) 또는 ‘얼’의 뜻,

즉 한얼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대종교는 한국의 민족기원의 단군신화에서 비롯되었고,

교리는 삼일신사상(三一神思想)에 근거하고 있다. “한얼은 한임ㆍ한웅ㆍ한검이시니(神者ㆍ桓因ㆍ桓雄ㆍ桓儉也)”라고 하였듯이, 한임ㆍ한웅ㆍ한검의 3신은 곧 일신(ᅳ神)의 삼위(三位)로 보고 있다. 우주와 세상만물을 창조한 조화주인 ‘한임’과 인간 세상에 내려와 만백성을 가르쳐 깨우친 교화주인 ‘한웅’

그리고 만물과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치화주인 ‘한검’인 것이다.

 

경전은 초인간의 계시인 계시경전(啓示經典)과 인간의 작품인 도통경전(道通經典)이 있는데, 계시경전(啓示經典)에 속하는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창립과 중광(重光)을 이룬 경전으로서 대종교의 기본경전이다. 이것은 366자의 한자로 씌어져 있고, 천훈(天訓)ㆍ신훈(神訓)ㆍ천궁훈(天宮訓)ㆍ세계훈(世界訓)ㆍ진리훈(眞理訓)의 5훈(五訓) 이외에 서문, 5훈에 대한 찬문(贊文), 삼일 신고 독법(請法), 삼일신고 봉장기(封藏記) 등이 기록되어 있다. 5훈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서문은 발해의 대야발(大野渤)이 발해 태조 고왕(高王)의 명을 받아 지었으며, 찬문은 고왕이 친히 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 밖에 계시경전으로 『천부경(天符經)』이 있다. 이것은 1916년 계연수(桂延壽)를 위해 태백산 석벽에 계시된 경전으로 윤세복에 의해 『종문지남(倧問指南)』에 수록되었다. 또한 도통경전으로는 나철이 성통공완(性通功完)한 뒤 계시를 받고 지은『신리대전』, 서일이 성통공완한 뒤 계시를 받고 지은 『회삼경(會三經)』, 윤세복이 대종교의 수행방법을 적은 『삼법회통(三法會通)』등이 있다.

 

전통적 의식은 중국 『한서』ㆍ『당서』등의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민족의 10월 제천대회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사를 선의식(儀式)이라고 한다. 선의식은 4대 경절 아침 6시에 단군성상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에서 모시며 절차는 홀기(笏記)에 따른다.

선의식이 실시되는 4대 경절은 상해 임시정부 때부터

음력 3월 15일을 단군 건국기념일로 삼아 기념해왔다.

한편 1949년부터 양력 10월 3일로 변경한 개천절과

하느님이 교화와 치화(治化)를 마치고 하늘로 오른 음력 3월 15일인 어천절(御天節),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한 중광절, 추석 고유명절인 가경절(嘉慶節)을 기념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식은 경배식으로 조배식(早拜式)과 야경식(夜敬式)이 있고,

일요일 낮에는 전체 교인이 모아 경배식을 거행한다.

 

출처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 편찬위원회,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국혼을 살리기 위해 시작했다.

곧 북한이 소멸하면 한반도는 단군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면서

 "우리 정체성을 일깨우고 싶었다.

개천절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적이 단 한 차례 밖에 없으며,

국무총리가 참석한 적도 없다.

단군이 천대받고 있다.

우리가 사생아가 되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출처] 차길진 법사가 말하는 한반도의 미래상|작성자 sancorea

 

 

 

 

반크 '고조선' 홍보 동영상

 

10월 3일 개천절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윗키백과

http://www.daejonggyo.co.kr/ (대종교)

http://www.daejonggyo.com/ (대종교 단군성전)

http://www.tangun.com/ (단군닷컴)

http://www.coo2.net/ (우리역사의 비밀)

http://www.daangoon.pe.kr/ (단군문화지도)

http://prkorea.com/ (사이버외교관 반크)

http://www.forthenextgenera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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