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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제 3대 태종대왕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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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1367~1422]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정식칭호 : 태종공정성덕신공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太宗恭定成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자 유덕(遺德). 휘 방원(芳遠).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한씨(韓氏).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 정도전 ·남은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이 박포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는 사간원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에서 분장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 파아손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 ·월소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모역을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4년 송도에서 한성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 부인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 ∼1420]

여흥 민씨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 어머니는 여산 송씨 선의 딸이다.

1365년 7월 11일 개성 철동에서 태어났고, 1382년(우왕 8)에 아버지 민제의 제자인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제1차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왔고,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같은해 11월에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에 그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10여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정비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일이 발생하던 그날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형제의 옥사(협유집권: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죄)를 계기로 하여 태종과의 불화는 더욱 더 심각해졌다.

민무구형제의 옥이 발발한 4개월 후 원경왕후는 금령을 범하고 친정과 내통했고, 이 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옥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태종은 원경왕후가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으로 만들었다.
민무구형제는 그뒤 태종이 원경왕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장모 송씨 등을 생각해 겨우 생명을 보전해나갔으나,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고, 1409년 10월에 그들의 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그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사서 민무구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을 염려하여 그녀를 내쫓지는 못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여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고, 1420년 7월 10일 수강궁 별전에서 사망했다. 시호는 원경왕후로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효령(孝寧)·성녕(誠寧) 등 4명의 대군과 정순(貞順)·경정(慶貞)·경안(慶安)·정선(貞善) 등  4명의 공주가 있다. 능은 헌릉(獻陵)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효빈 김씨(孝嬪 金氏)[ ? ~ 1454]

김점(金漸)의 딸로 원래 원경왕후 민씨의 몸종으로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 아들을 낳았고, 그 공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빈에 봉해졌다. 소생으로는 경녕군이 있다.

 

신빈 신씨(信嬪 辛氏)[ ? ~ 1435]

영월 신씨 영귀(辛永貴)의 딸로 처음에 옹주에 봉작되었다가 1422년 태종이 병으로 누워 있을 때 간호를 전담하여 신녕궁주(愼寧宮主)가 되었고, 이후 빈이 되었다. 소생으로는 함녕, 온녕, 근녕군 등 아들 3명과 정신, 정정, 숙정, 소신, 숙녕, 숙경, 숙근 옹주 등 딸 7명을 두었다.

 

선빈 안씨(善嬪 安氏) [?~1468]

안의(安義)의 딸로 궁인으로 입궁하여 숙선옹주(淑善翁主)에 봉해졌다가 후에 선빈으로 진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익녕군, 소숙옹주, 경신옹주가 있다.

 

의빈 권씨(懿嬪 權氏) [생몰년미상]

권홍(權弘)의 딸. 궁인으로 입궁하여 정의궁주에 봉하여지고, 정혜옹주를 출산하여 1422년 2월에 의빈으로 진봉되었다.
1422년(세종 4) 태종이 죽자 비관하여 세종에게 고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다.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 유를 맡아서 길렀고, 1453년(단종 1) 늙고 병들자 금성대군이 사저에 머물수 있도록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혜빈궁 양씨(惠嬪宮楊氏)의 처소로 옮겨서 지냈다.
1457년(세조 3) 선왕을 위하는 왕의 특별배려로 궁호를 영수궁(寧壽宮)으로 고쳤다.

소생으로는 정혜옹주가 있다.

 

소빈 노씨(昭嬪 盧氏) [?~1479]

노구산(盧龜山)의 딸로 소혜궁주에 봉해졌고, 후에 소빈으로 진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숙혜옹주가 있다.

 

명빈 김씨(明嬪 金氏) [ ? ~ 1479]

안동 김씨 구덕(金九德)의 딸로 1411년(태종 11) 11월 명빈으로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숙안옹주가 있다.

 

숙의 최씨 (淑儀 崔氏) [생몰년미상]

태종이 죽고 나이가 들은 뒤 궁에서 나가 사가의 아들 집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소생으로는 희령군이 있다.

 

숙공궁주 김씨(淑恭宮主 金氏) [생몰년미상]

김점(金漸)의 딸. 세종 때 평안도 관찰사였던 김점은 최오을마대(崔吾乙鹿大)란 장사꾼을 반인(伴人)으로 삼아 도내의 재물을 긁어모았다. 또 토관(土官) 같은 벼슬을 팔고 옥사(獄事)도 뇌물 액수에 따라 처리하였으며 사신들의 행렬에도 뇌물을 챙겼다. 이에 세종은 숙공궁주 김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덕숙옹주 이씨 (德淑翁主 李氏 ) [ ? ~ 1433]

궁인으로 입궁하여 1407년 11월에 옹주에 봉해졌다.

 

순혜옹주 장씨 (順惠翁主 張氏) [?~1423]

안동 장씨 화산군 사길(花山君 張思吉 ?~1418)의 딸로 기생첩 복덕의 소생

 

혜선옹주 홍씨 (惠善翁主 洪氏) [생몰년미상]
보천의 기생 출신 가희아(可喜兒)

 

혜순궁주 이씨(惠順宮主 李氏) [생몰년미상]

고성 이씨 운로(李云老)의 딸.

결혼하여 일찍  홀로 되어 태종의 후궁으로 오게 되었다

 

신순궁주 이씨(愼順宮主 李氏) [생몰년미상]

성주 이씨 성산부원군 문경공 직(星山府院君 文景公 李稷 1362~1431)의 딸.

태종과는 재혼으로 일찍이 혼자가 되어있다가  태종의 후궁으로 오게 되었을 때의 나이는 33세였다.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생몰년미상]

한양 조씨 절효공 뢰(節孝公 趙賚 1374~1449)의딸.

 

■ 자녀 

<적장남> 양녕대군 제 (讓寧大君?)[1394 ∼1462]  - 원경왕후 민씨 소생

자는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1400년 원자가 되었고, 140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으며, 1407년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자유분방한 성품을 지닌 양녕대군은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대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한다든가 하는 자유분방한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같은 그의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음은 물론,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수차에 걸쳐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하였으나, 그는 끝내 그런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그의 동생이며, 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폐세자가 된 이후에도 과거의 왕세자였다는 것, 현왕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 있었지만,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한로(漢老)의 딸로 3남 4녀를 얻었고, 여러 첩들에게서 7남 1녀를 얻었다.

 

<적2남> 효령대군 보(孝寧大君補)[1396 ∼1486] - 원경왕후 민씨 소생

초명은 호(祜).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이다.

1407년(태종 7) 효령군에 봉해지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434년 4월 회암사(檜巖寺)의 중수를 건의하고, 1435년 회암사에서 불사를 개최하였다. 그해 5월 흥천사탑전(興天寺塔殿)의 수리를 관장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용문산 상원사(上元寺)에 종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1460년(세조 6) 4월 왕세자빈의 책봉사가 되었으며, 1464년 5월 회암사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개최하고 그해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였다. 1465년에는 《반야바라밀다심경 般若波羅蜜多心經》을 언해하고, 1465년 《원각경》을 수교(讐校)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고,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연고존친(年高尊親)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며,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禪家)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이 많았지만,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공헌한 바 크다.

부인은 해주 정씨 역의 딸인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정씨로 6남 1녀를 두었고, 첩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적3남> 세종 - 원경왕후 민씨 소생

 

<적4남> 성녕대군 종(誠寧大君種)[1405 ~ 1418] - 원경왕후 민씨 소생

처음에는 성녕군에 봉하여졌다가 1414년(태종 14)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부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1417년 대광보국(大匡輔國)의 위계에 올랐으나 이듬해 14살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죽었다.
그의 장례는 《가례》에 의거하여 엄수되었고, 태종은 이를 애통하게 여겨 그의 사저(私邸)를 원찰(願刹)로 삼아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언(代言) 등의 계청에 따라 경기도 고양 북산에 있는 그의 묘소 남쪽에 대자암(大慈庵)을 세우고 사패지(賜牌地)를 내려 불공을 올리게 하였다. 그해에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에 추증되었고, 또한 대자암은 선종(禪宗)에 속하는 원찰로 왕족의 기신제(忌晨祭)를 설행하는 처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부인은 창녕 성씨 억의 딸로 소생은 없으며, 효령대군의 아들 원천군이 후사를 이었다.

 

<적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1385∼1460] - 원경왕후 민씨 소생

1399년영의정부사 서원부원군 이거이의 차남인 청주 이씨 청평군 백강에게 출가해서 딸 하나를 낳았다.

 

<적2녀> 경정공주(慶貞公主)[?~1455] - 원경왕후 민씨 소생

1403년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조인규의 4세손이자, 영의정부사 평양부원군 조준의 아들인 평양 조씨 평양군 대림에게 출가하여 1남 4녀를 낳았다.


 

<적3녀> 경안공주(慶安公主) [?~1419]- 원경왕후 민씨 소생

1404년 안동 권씨 찬성 근의 아들인 길창군 규에게 출가하여 아들 2명을 낳았다.

 

 

<적4녀> 정선공주(貞善公主)[ ? ~ 1424] - 원경왕후 민씨 소생

의령 남씨 경문의 아들인 의산군 휘에게 출가하여 아들 1남을 낳았다.

# 아들이라고 알려진 남이는 정선공주가 죽은 지 17년 후인 1441년에 태어났다.

 

 

<서장남> 경녕군 비(敬寧君?) [1395 ~ 1458] -  효빈 김씨 소생

천성이 어질고,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학문에 밝아 양녕대군·효령대군·세종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5조에 걸쳐서 왕실과 국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충성을 다하여 해결하도록 노력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태감(太監) 황엄(黃儼) 등이 오자 왕자를 대신하여 태평관에서 접대하였고, 또 황엄이 왕자의 사은(謝恩)을 요구하자 사은사(謝恩使)에 뽑혀 북경에 가서 명나라 성조(成祖)로부터 기린·사자·복록(福祿)·수현사(隨現寺)·보탑사(寶塔寺) 등 상서로운 그림 다섯폭과 《신수성리대전 新修性理大典》·《사서오경대전 四書五經大典》 등과 황금 100냥, 백금 500냥, 말 12필, 양 500두, 비단 50필, 명주 500필 등 많은 물품을 얻어왔다.
세종초에 기생 일타홍(一朶紅)과의 염문이 문제되어 대간들로부터 여러 번 탄핵받았으나 세종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30년에 대광보국(大匡輔國)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충주로 피하여 여생을 마쳤다.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부인은 청풍 김씨 관의 딸인 청원부부인으로 아들 4명을 얻었고, 여러 첩들에게서 6남 2녀를 두었다.

 

<서2남> 함녕군 인(?寧君?)[1402 ~ 1467] - 신빈 신씨 소생

자는 정경(正卿). 1413년 정윤(正尹), 1414년에 원윤(元尹), 1417년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다.

1429년(세종 11)왕명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금과 은으로 보내던 종래의 세공(歲貢)을 소·말·포(布)로 대신하기로 명나라 성조(成祖)의 허락을 받고 돌아왔다.

1430년(세종 12) 27세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작되고, 1433년(세종 15) 태종의 존호를 공정대왕(恭定大王)으로 올리게 되니 공(恭)자를 피하여 함녕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으로 진봉되었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 좌의정 사강의 딸인 전주군부인(全州郡夫人)으로 1남 2녀를 두었다.


<서3남> 온녕군 정(溫寧君?)[1407 ~ 1453] - 신빈 신씨 소생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종학(宗學)에서 수학할 때 여러 아우들의 모범이 되어 궁중에서도 존중을 받는 왕자였다. 시호는 양혜(良惠)이다.
부인은 순천 박씨 안명의 딸인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으로 소생이 없어, 근녕군의 아들 우산군으로 후사를 이었다.

 

<서4남> 근녕군 농(謹寧君?)[1411 ~ 1461] - 신빈 신씨 소생

처음 정윤에 봉해졌다가 1424년 10월 근녕군에 봉해지고, 세종대왕을 도운 공으로 익사공신으로 녹훈되었다. 1426년에 가정대부로, 1428년 7월에 종1품 군으로, 1430년 12월에 정1품 군으로 승계되었다.

어려서부터 시예(詩禮)를 좋아하고, 덕행이 있어 영예가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겸손하여 양녕·효령 두 대군의 지덕에 난형난제라 일컬었다.
단종이 손위할 때 종실백관이 모여 동맹하는데, 혼자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맹훈하는 책에 서명하지 않고 관악산 연주대에 올라 14일간 절식하며 통곡하였다. 세상에서 6종영(안평대군 · 금성대군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 · 하령군)에 들만하다고 하였다. 현손인 원굉(元紘)의 상소로 그 충성과 큰 공업이 종친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비답(批答)이 내렸다.

1872년(고종 9)에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희의(僖懿)이다.

부인은 하양 허씨 지혜의 딸인 태안군부인(泰安郡夫人)으로 소생으로는 2남 6녀를 얻었다.

 

<서5남> 혜령군 지(惠寧君祉)[ ? ~ 1440] - 고씨? 안씨?

자는 선여(善餘), 호는 동계(桐溪). 세종으로부터 양회(襄懷)라는 시호를 받았다.

혜령군은 어린 시절 매우 호방하고, 외향적인 성품으로 사냥과 함께 무(武)를 연마하기를 즐겼다.

1438년(세종 20) 혜령군의 나이 32세 때 정월에 왕명으로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인 계품사(計稟使)를 임명함에 있어 혜령군을 정사(正使)로, 예조판서 권제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세종은 친히 모화관에 나와 전별(餞別)하면서 입자(笠子)와 이엄(耳掩)을 하사했다. 같은 해 5월 혜령군과 예조판서 권제가 계품사의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세종은 왕세자에 명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사정전에 나가 계품사 일행을 영접케 하고 안마(鞍馬)와 전(田) 50결(結)과 노비 5구(口)를 혜령군에게 하사하였다. 이는 혜령군에 대한 세종대왕의 신임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1440년(세종 22) 젊은 나이로 혜령군이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매우 상심하여 수라도 들지 않고,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부인은 무송 윤씨 변의 딸인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으로 1남 3녀를 낳았다.

<서6남 > 희녕군 타(熙寧君?)[ ? ~ 1465] - 숙의 최씨 소생

어려서부터 어질고 총명해서 항상 시 · 서 · 예 · 악에 대한 공부를 일삼았으며,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므로 음율을 잘 이해하게 되어 동방 아악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희령군은 군신간이면서 부자간인 태종대왕에게 더욱 총애를 받게 되어 평생 보배로서 아끼던 거문고를 하사받는 은총을 누렸다.
희령군은 본래 자연을 사랑하고 부귀에 관심이 없어서 서울 남쪽 율현리(栗峴里)에 거처하면서 거문고를 타고 독서를 하며 화초기르기를 낙으로 삼았다. 양녕 · 효령 두 대군과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양녕대군의 세자위 사양에도 희령군의 협찬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희령군과 정인지 · 권제 · 안지 등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여 조정의 악장으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에 희령군으로 봉해졌고, 1453년(단종 1) 당시 권문세가인 “윤처공(尹處恭)의 집을 희령군에게 내려 주라”고 호조에 전지(傳旨)하였다. 만년에는 동대문 밖 왕강동(旺崗洞) 현 창신동 사저에서 독서와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 어사금을 항상 즐겼다. 평생동안 겸허한 마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마치니, 이 집이 곧 양녕대군의 집으로서 중년에 양녕대군이 사직동으로 이사한 후 희령군에게 물려준 것이다. 고종 때에 현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이정(夷靖)이다.

첫번째 부인은 순창 신씨 숙생의 딸인 순창군부인(淳昌郡夫人)으로 소생은 없으며, 두번째 부인은 평산 신씨 사렴의 딸인 평산군부인(平山郡夫人)으로 아들 3명을 얻었다.


<서7남> 후녕군 한(厚寧君 示干)[?  ~ 1455] - 덕숙옹주 이씨?  최씨?


천성이 조신하고 신의가 두터워 어려서부터 의리를 중히 여겼다. 1455년 단종이 선위할 때 신병을 이유로 군정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을 쓰지도 않고 버선도 신지 않는 등 일부러 비정상적인 행위를 했다. 10월 6일에 조용히 자진하였다. 그래서 설해(雪海) 이의만(李義萬)은 공의 절의를 장려하여 말하기를 `사육신과 같다'하였다. 1872년(고종 9)에 소덕대부(昭德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희도(僖悼)이다.

첫번째 부인은 평산 신씨 경종의 딸인 무안군부인으로 딸 1명을 얻었고, 두번째 부인은 동양군부인 한양 조씨로 2남을 낳았다. 첩에게서는 2남 1녀를 얻었다.


<서8남> 익녕군 치(益寧君 示多)[1422 ~ 1464] - 선빈 안씨 소생

시호는 소강(昭剛)이다.

부인은 운봉 박씨 종지의 딸로 딸 1명을 얻었고, 2명의 첩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서장녀> 정혜옹주(貞惠翁主) [?~1424] - 의빈 권씨 소생

운봉 박씨 신의 아들인 종우에게 출가하였고, 소생은 없다.

<서2녀> 정신옹주(貞信翁主) - 신빈 신씨 소생

파평 윤씨 향의 아들인 영평위(鈴平尉) 계동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서3녀> 정정옹주(貞靜翁主) - 신빈 신씨 소생
양주 조씨 말생의 아들인 한원군(漢原君) 선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서4녀> 숙정옹주(淑貞翁主) - 신빈 신씨 소생
연일 정씨 진의 아들인 일성군(日城君) 효전에게 출가하여 2남 4녀를 낳았다.


<서5녀> 소신(선)옹주[昭善翁主) [?~1437] - 신빈 신씨

원주 변씨 상주의 아들인 효순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서6녀> 숙혜옹주(淑惠翁主) [?~1464] - 소빈 노씨 소생

성주 이씨 사후의 아들인 성원위(星原尉) 정녕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서7녀> 숙녕옹주(淑寧翁主)[생몰년미상] - 신빈 신씨 소생
파평 윤씨 수미의 아들인 파성위(坡城尉) 우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서8녀> 소숙옹주(昭淑翁主)[?~ 1456] - 선빈 안씨 소생

해평 윤씨 연성의 아들인 해평위(海平尉) 사명( 윤연명(尹延命))에게 출가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서9녀> 숙경옹주(淑慶翁主)[생몰년미상] -  신빈 신씨 소생

파평 윤씨 태산의 아들인 파평군(坡平君) 암에게 출가하여 6남 1녀를 낳았다.


<서10녀> 경신옹주(敬愼翁主)[생몰년미상] - 선빈 안씨 소생

전의 이씨 공전의 아들인 완에게 출가하여 6남 1녀를 낳았다.

 

<서11녀> 숙안옹주(淑安翁主)[?~1464] - 명빈 김씨 소생

회덕 황씨 자후의 아들인 유에게 출가하여 아들 3명을 낳았다.


<서12녀> 숙근옹주(淑謹翁主) [?~1450]- 신빈 신씨 소생
안동 권씨 복의 아들인 화천군(花川君) 공에게 출가하여 아들 1명을 낳았다.


<서13녀> 숙순옹주(淑順翁主)[생몰년미상] - 덕숙옹주 이씨 소생
파평 윤씨 창의 아들인 평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참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太宗朝故事本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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