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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춘추는 신라를 승리의 길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멸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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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일제 식민사관=식민사관의 변종인 현재의 민족사관=신라에 대한 자학사관'을

넘어 참된 민족사관을 바라면서>

일제식민사관의 폐해이자, 식민교육의 연장선인 신라비토와 김춘추 비난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국사교육과 식민사관의 변종인 오늘날의 민족사관을 근본적으로 혁파해야,

식민사관의 핵심인 신라비토의 교육을 받아 이를 무개념으로 추종하는 자들의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켜야 참된 민족사관이 열린다.

우리가 일본과 중국의 시각을 추종하여(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추종하여) 신라비토에 집중하면

한국사의 미래는 없다. 우리보다 앞서 신라를 주체적 관점으로 본 나라가 청나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신라와 통일신라의 영토를 바라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논리적으로 이길수 있다.

( * 일본서기를 제대로 보려면 먼저 사건이 조작, 창작되었는지 봐야하고,

사건이 실재했더라도 일본서기의 허황된 주관적 관점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보아야  

오도된 내용을 바로 잡을 수 있다. * )

 

<김춘추는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보면 영웅이다>

 

신라의 삼한일통은 왜놈세력을 이땅에서 완전히 제거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김춘추는 최악의 조건에서 신라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다.

그의  가문은  서로를  희생해가며 신라를 지켜냈다.

어느 조직이나  기업이나 단체에도 연개소문 보다는  김춘추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

 

김춘추는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한중일 삼국을 넘나들며 외교활동을 벌인다.

적국 고구려에 들어가서 연개소문에 동맹을 제안했고,

바다건너 왜로 가서는 한반도 문제에서 중립을 보장받으려 했었고,

다시 바다건너 당으로 가서 백제-왜-고구려 연합에 대응한 나당동맹을 맺는다.

김춘추 폄훼론자들은 단지 딸 고타소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고구려, 왜, 당을 넘나들며

연합을 시도했다고 하나, 상식적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촉매제에 불과하다.

근원적으로 나당연합의 원인은 자신의 조국 신라가 존망의 기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집권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내의  온건파들을  몰살시키고 왕을 시해한것은 그의 권력이

태생적 한계에서  시작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강경일변도로 나갔고, 유연한  외교는 애시당초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그의 권력 독점은 그의 사후 연개소문 집안이 매국 가문으로 변질되게  한 원인이다.

온건파들을  모두 제거 해버림으로써  견제할수 없는 권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족감정으로 그시대를 재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백제는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외세인  왜를 처음으로 한반도에 끌임으로써

한반도 비극의 최초 원인자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연개소문 마저도  나당연합에 밀리자, 왜의 군사를 한반도에 끌어 들였다.

 

김춘추가 고구려의 지도자 였어야 했다.

신라보다 훨씬 좋은 국력과 조건을 가졌던 고구려를 더 크게 했을 것이다.

협력을 구하러간 외교사절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고 땅내놓으라 한,

연개소문은 외교는 없고 무대포만 있었다.

(연개소문이 동맹을 맺으러 간 김춘추에게 삼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치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의 근거는 위서논쟁이 있고,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위서로 보고 있는 환단고기에만 나오고, 다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환단고기는 1911년에 이유립이 전해지는 사서를 토대로 저술하여 간행했다는 책이다. 

동맹을 구하러간 외교사절을 감옥에 가두고 죽령이북의 신라땅을 내놓으라 한 연개소문이 이런 제안을 했다는 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것은 왕을 시해하고 온건파를 제거해버린 연개소문 다운 무능외교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이  정당성 확보를 위해 벌인, 신라를 등돌리게 한 악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역사에 등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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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평양지배와 신라의 북방영토>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 가문의 평양지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의 저자(著者) 강경구이다.
그는 고구려 멸망후 평양성은 당군과 함께 신라 김유신 군대가 진수하고 있었고,
그 근거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향고기>와 여러 문헌사료를 토대로 논증한다.

 

김유신의 군대와 가문이 고구려 멸망후부터 계속하여 평양지역에 지배권을 가졌고,
나당전쟁 승리후부터 김유신 가문의 후손들의 행적을 근거로 평양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계속 유지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당을 물리친후 신라는 평양지역을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이 아닌 김유신 가문의 군벌이 관할하게 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준 것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 말미에 첨부된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있는 지명들을 서북방 지명들로 보았다.
또한 당측이 성덕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신라가 패강지역에 ‘戍’를 설치하려 한다고 지적한 국서 내용을 근거로 들면서 신라가 평양지역을 포함한 서북방에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제가 아닌 특별 군사지역인 향성(鄕成)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제 식민사관의 틀에서 극복할 때가 되었다.

“고려사에는 압록강 일대가 신라의 옛지역이라는 언급이 나오고, 1107년 윤관 장군이 동북방 여진을 정벌할때도
스스로의 공적을 신라의 김유신에 비기고자 하였다. 즉 12세기 고려인들은 압록강을 북방경계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이는 신라에서 계승되었다고 하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이상훈)

적어도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부터 조선후기까지는 신라가 평양일대와 서북방 지역을 관리,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반적 인식이었음을 밝히면서, 우리가 일제의 시각이 아닌 한국의 주체적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 강경구가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에서 논증하려던 바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신라의 관점으로 신라의 북방영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당나라의 관점과 왜의 관점으로 신라의 북방영역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현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스스로가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남북한 모두 발해를 강조하면서 일제강점기때 식민사관으로 형성된 신라의 북방영토 축소는, 현재 (신라를 축소시키고 발해를 강조하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남북한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고착화되기에 이러렀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게 신라의 북방영토를 인식하였던 고려, 조선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나라는 아예 발해건국전까지 신라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울렀다고 기록했다.

신라의 관점으로 신라의 북방영토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시대구분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676~698) –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로 재정립이 필요하다.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는 한반도와 만주가 동일한 역사 카테고리에 묶인다는 것을 주장한다. 중국 한족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의 역사는 빠져있다. 숙신-여진족의 역사체계를 만들다 보니 고구려 역사 자체를 빼버린 것이다. 그러나 숙신, 부여, 삼한, 백제, 신라, 발해, 금나라, 청나라는 동일한 역사카테고리로 묶고, 특히 금나라 국호는 신라왕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라인이 여진으로 건너가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고 만주원류고는 기록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역사문제인,

동북공정을 이길려면 논리적 정공법도 필요하지만, 동북공정식 논리로 공격하는게 훨씬 효과적이다. 미국이나 서구인들에게 그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김유신의 평양왕국과 신라의 북방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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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한일통으로 만주땅을 잃었다는 주장은, 일제 식민사관보다 못하고, 발해를 부정하는

중국 동북공정을 추종하는 짓이다>

 

당은 나당전쟁의 패배로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는데,

이상황에서 신라의 나당전쟁 승리(676)부터 발해건국 전(698)까지 삼한일통 기간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당의 영토냐? 아니면 신라의 영토냐? 문제가 등장한다.

(신라도 당도 실효적 지배는 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는 압록강 이남 영토를 신라영역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나온다.

“12세기 초 (여진)에게 타격을 입은 (거란)가 내원성과 구주성을 환부해주고 달아나자, 고려조정에서는  압록강을 경계로 관방을 설치하였다. 백관이 왕에게 표문을 올려 이를 축하하였는데, ‘압록강 일대는 신라의 옛지역이라는(고려사 권14, 세가, 예종12 3월조) 언급이 나온다.”(나당전쟁연구 P.42, 이상훈)

 

또한 신라 최치원이 당황제에게 올린 사불허북국거상장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는

신라 효소왕이 발해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관직을 준것으로 나온다.

이는 당이 대조영에게 발해 군왕으로 책봉하기 전으로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는 만주와 한반도의 통일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식민사관론적 민족사관(국사교과서)은

이상황을 신라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잃어버린것으로 보고,

당이 그땅을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중잣대의 거짓된 외세, 민족 관념을 적용하여

일제식민사관보다 더 심하게 신라비토에 집중한다.

그러한 교육의 결과, 오늘날 일반적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갇혀 버렸고, 신라비토가 주류다.

정말 일제의 식민사관보다 못한 관점이다.(식민사관조차 압록강 이남을 신라 영토로 인식했다.)

18세기 청나라는 발해건국 전까지 만주와 한반도는 신라땅이라고 인식하였다.

신라통일에 대한 청나라의 관점을 보면

당나라는 신라의 삼한일통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얻은것은 없고

신라에 이용만 당했다고 보는 논리와 마찬가지다.

어찌 청나라나 일본제국주의 보다 못한것이

신라에 대한 현재의 잘못된 주류적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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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은 고구려, 백제, 신라인가? 신라, 백제, 가야인가?>

 

신라말 최치원이 마한, 진한, 변한을 고구려, 신라, 백제로 비정한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김춘추와 연개소문이 활동한 7세기에도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인식한 사례가 나온다.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을 삼한인(三韓人)으로 호칭한 점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7세기 초반부터 삼국(三國)을 삼한(三韓)이라 불러 왔는데,
이것은 3개의 한(韓)과 3개의 국(國)을 각각 일대일로 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3한과 3국을 뭉뚱그려 포괄적으로 인식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
(盧泰敦,「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硏究』38, 1982 pp.130-133).
그렇지만, 645년에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을
마한(馬韓) 추장(酋長)이라 한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마한(馬韓)으로 인식한 전제 위에서 삼한(三韓)이란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당나라와 고구려인들이 고구려가 삼한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때,
신문왕 6년(686) 청주 운천동 사적비에 나오는 '民合三韓而廣地'에 삼한과
신문왕때 태종 무열왕의 묘호와 관련하여 당에 보낸 문서에 나오는 '일통삼한의 대업'에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발해가 건국되기 전에(20여년), 신라와 당이 대립관계에 있을 때
신라인들이 말한 일통삼한(삼국사기)과 일통삼국(삼국유사)은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킨것이 분명하다.
이 당시의 신라 영토와 인구는 삼분의 일은 백제의 것이었고, 또 삼분의 일은 고구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통합을 위한 정치적 수사라 하더라도 삼국일통이라는 인식과 구호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신라시대는 민합삼한(民合三韓), 고려시대는 일통삼한과 일통삼국, 조선시대는 신라통일이라 하였기에

고구려의 역사는 우리역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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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인가? 남북국시대인가?>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는 어느것이 맞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둘다 맞다. 단지 시대 기간(期間)이 다를 뿐이다.

나당전쟁승리후 발해건국전후까지를 통일신라시대

발해건국후부터 남북국시대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와 금나라)

 

고려사에는 발해건국전까지 신라영토를 압록강 일대까지로 인식하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는 한걸음 더나아가 만주원류고에서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신라영토로 보았다.

둘다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후 당이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긴후부터 발해 건국 전까지

신라영역에 대한 인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학자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힘의 공백지대를 당의 영토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식민사관론과 동북공정론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자신들의 국력의 총량을 정확이 알았다.

그래서 나당전쟁기간 당과의 전투에서 패한후에는 여러 번 사죄사를 보냈다.

일종의 굴욕일수 있겠지만, 유화책으로서 전열을 가다듬을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전술이고,

당이 신라와의 전쟁에 올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신라의 최종 전략은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신라가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선제공격한 것은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적이 사건이다.

 

토번 때문에 신라가 살아났다고 폄하하는 식민사관론자들과 동북공정론자들이 많은데,

반대로 오히려 신라 때문에 토번이 당과의 전쟁에서 덕본 사실을 외면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후 669년 신라는 당이 주둔하고 있는 백제고지를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은 시작된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670 3월 설오유와 고연무의 2만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신라는 요동을 선제공격한다. 신라 설오유와 함께 오골성 전투에

참여한 고연무는 황해도 재령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부흥세력이었다.”(나당전쟁연구, 이상훈)

 

물론 토번이 당과 전쟁함으로써 당이 두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뤄야 했기 때문에 신라가 유리해진 면은 있다. 동시에 그것은 신라가 당과 전쟁을 했기 때문에 토번이 유리해진 면도 있는 것이다.

당나라가 강대국이었다고 하나 여러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다.

즉 신라와 토번이 당과의 전쟁을 하면서 상호작용을 일으켜 당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분산시켰기 때문에 돌궐이 다시 일어나고 발해가 건국되는 여지가 생긴것이다.

발해가 건국될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의 대당투쟁때문이고,

외부적 요인으로 신라와 토번의 대당전쟁과 북방민족의 발흥 등이 있다.

발해가 돌궐과 친선우호관계를 맺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통교를 했고 신라는 이때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내린다. 신라도 나당전쟁은 종결됐지만 당과 대립관계에 있었으므로

당을 견제하기위해서 발해와 통교했던 것이다.

이시기 신라와 발해는 당에 대하여 공동전선을 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사관론자들과 동북공정론자들은 신라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아예 무시한다.

한심한 작태로서 오늘날 중국과 일본 학계와 견해를 같이한다.

최소한 객관적 관점도 없이 신라비토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의 국제관계를 보면

1)     신라 토번 발해 돌궐 vs (통일신라시대: 나당전쟁승리부터 발해건국전후시기)

2)     신라 vs 발해 돌궐 (발해무왕의 당나라 공격시기)

    *732년 발해 무왕이 당을 공격하고, 733년 신라가 당의 요청을 받고 발해를 공격한다.

이후 735년 신라는 당으로부터 패강(浿江:대동강) 이남 지역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이는 실체가 없는 무의미한 외교행위일뿐이다. 발해가 완전한 국가로 있는 마당에

대동강 이북이 당나라땅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이미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가 정착된 시기이다.

     나당전쟁으로 신라와 당의 영토분할 약속은 오래전에 완전히 무효화 되었다고 봐야한다.

3)     신라와 발해와 당의 평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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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새롭게 사용하여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킨다.>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일제가 삼국통일신라가 아니라 반도통일신라의 줄임말로써 신라와 발해에

해당하는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구분하기로 하면서부터라고 주장하면서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식민사관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우리가 주체적 시각으로 통일신라의 내용과 시대구분을 새로이 한다면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도 신라통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가 있다.

즉 통일신라는 일제가 의미한 반도통일신라가 아니라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역사관인

만주와 한반도를 통합한 신라로 보면 된다.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는 발해건국전까지 신라영토를 만주와 한반도 전역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시대구분도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당을 요동으로 몰아낸후부터(676) ~ 발해건국 전후(698)까지를 통일신라시대로 보고, 그이후 시대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새로이 구분하면 되는 것이다.

시대구분 :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676~698) – 남북국시대

 

신라시대에는

신문왕 6686년에 세워진 청주 운천동 사적비에는 민합삼한이광지(民合三韓而廣地)라는 명문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의 삼한통합의식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삼한은 당연히 고구려, 백제, 신라이다.

당시 당나라에도 마한을 고구려로 인식하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신라말 최치원이 마한, 진한, 변한을 고구려, 신라, 백제로 비정한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200년전에 이미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으로 인식한 사례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을 삼한인(三韓人)으로 호칭한 점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7세기 초반부터 삼국(三國)을 삼한(三韓)이라 불러 왔는데,

이것은 3개의 한() 3개의 국()을 각각 일대일로 대응시킨 것이 아니라

3한과 3국을 뭉뚱그려 포괄적으로 인식하면서 나타난 결과로 이해한 견해가 있다

(盧泰敦,三韓 대한 認識 變遷」『韓國史硏究38, 1982 pp.130-133).

그렇지만, 645년에 당나라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

마한(馬韓) 추장(酋長)이라 한 사례를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마한(馬韓)으로 인식한 전제 위에서 삼한(三韓)이란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신라통일을

삼국사기에 일통삼한(一統三韓)으로 삼국유사는 일통삼국(一統三國)으로 표현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일통삼한은,

신문왕때 태종 무열왕의 묘호와 관련하여 당에 보낸 문서에 나오는 '일통삼한의 대업'에서 나오는데, 앞에서도 본것처럼 삼국시대때 이미 마한을 고구려에 비정하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가리킨다.

 

신라통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예는,

조선후기의 문신 홍여하(1621~1678)는 휘찬려사(彙纂麗史)라는 고려 역사를 편찬했는데,

그의 문집인 목재집에 신라통일(新羅統一)’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다.

 

물론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의 역사관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이를 만선사관과 연결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만선사관과는 관점 자체가 전혀 다르다.

일본인의 관점인 만선사관은 한반도 역사가 만주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식민사관의 아류이지만

만주원류고에서 보이는 청나라의 사관은 만주와 한반도가 종속이 아닌 수평적 관계로 보았다.

만주와 한반도의 수평적 역사서술이 청나라 만주원류고가 드러내는 역사관이다.

 

식민사관을 깨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는 논리가 만주원류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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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통일 때문에 사대주의가 시작됐다거나, 조선이 멸망했다거나 현재 우리가 약소국이 됐다는

거짓최면은 식민사관 때문이다.>

 

식민사관의 본질은 조상탓을 하게 만들어 미래도 너희나라는 그럴것이다는 의식을 심어주어

우리를 패배주의에 몰아가는 것이다.

신라비토의 역사는 그전에는 전혀 없다가, 일제강점기와 궤를 같이한다.

식민사관의 본질 중 하나는 신라 비토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대주의나 약소국을 들먹이며 신라탓을 하는 것은 식민사관 추종자와 다를 바 없다.

하나만 물어보자.

몽골조상은 세계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지금은 왜 명맥만 유지하는 약소국이 되었나?

그것도 조상탓인가. 후손들 스스로가 잘못해서인가.

징기스칸이 세운 세계 초강대국 몽골이었으니 지금도 몽골은 초강대국이어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한가.

고구려가 강국이었으면 지금도 우리나라는 강대국일 것이라는 근거는 도대체 뭔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처하는 북한은 왜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나는가.

고구려가 강국이었으니 북한은 지금 엄청난 강대국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에 대국이라며 사대하고,

나라 이름도 화령과 조선 중에 명이 정해준 조선으로 한 것도 신라통일 때문인가.

역사가로서 신채호는 나라이름까지 대국이라며 명()에서 정해준, 조선으로 한 이성계에 대해선

침묵했다. 일본의 식민사관과 같이 신라비토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혐신라와 맞지않는

역사적 사건들은 누락시키고 무시하였다.

 

조선말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여 강대국이 되었는데,

반면 조선의 경우, 근대화에 실패한 것도, 식민지가 된것도 약소국이 된것도 신라탓인가.

이런 식민사관의 틀에 갇힌 거짓관념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신라만 사대외교를 확대하여 현미경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부류때문에 그렇지,

거시적으로 보면 이는 신라만 그런게 아니라, 중국 한나라도, 왜국도, 고구려, 백제도 마찬가지다.

사대외교는 힘이 약한 나라가 실리를 얻을 수 있는 외교전략이다.

(반면 조선중기 이후 명(明)나라에 실리가 아닌 정신과 영혼까지 사대한 조선의 사대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도 흉노의 묵특 선우에 패배하자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고 조공을 하였다.

왜놈들도 송나라에 가서 삼한을 속국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조공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사신도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사신의 깔끔한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왜사신은 신발도 없이 걸레같은 옷을 입은채로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를 보면,

삼국 중에 조공을 가장 많이 보낸 나라가 고구려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때도 조공을 하였다.

 

백제는 472년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그내용이 사대주의의 극치다.

 

중국 魏書 백제 개로왕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어 후궁에서 청소를 하게 하고, 아울러 자제들을 보내어 마굿간에서 말을 먹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이나 한 사람의 匹夫라도 감히 저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한편

태종무열왕릉비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列大王之碑)라는 명문글귀가 보이는데,

신라가 당과 똑같이 태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당이 문제를 삼았으나 결국에는

거부하고 계속 사용하였다.

또한

최치원이 쓴 사불허북국거상장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는

신라 효소왕이 발해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5품 벼슬인 대아찬(大阿餐)이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시기에 신라와 당은 나당전쟁후

대립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대조영이 신라와 통교함으로써, 건국초기였던 발해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형식상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신라 때문에, 김춘추 때문에 사대주의와 약소국 운운하는 것은 식민사관의 변종일뿐인

시각임을 위의 예로써 알수 있다. 사대주의가 아니기에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당을 요동방면으로 몰아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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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의 잔재인 신라 비토 역사관의 연원과 논리적 헛점과 모순 -민족개념의 허상과 거짓논리들->

 

이중잣대의 외세 및 영토 환상과 구호는 무논리의 표본이므로 국사교과서에서 사라져야한다.

역사가로서 신채호의 심각한 오류는, 백제왜의 관계로 봤을때 우리가 왜놈하고 한민족이 됐을수도 있다는 점을 외면하면서도, 이중잣대로 신라만 오늘날의 민족관념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장수왕때인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라 부르며 오랑캐로 차별하였다.

그렇게 칭송하던 연개소문도 왜군을 이땅에 불러들였다.

이러한 기본적 사실관계(백제왜, 고구려≠신라)를 무시한채 신채호는, 일본의 식민사관의 변형으로

신라 비토의 역사관을 처음으로 여는 잘못을 했다.

신채호의 이중잣대는

백제와 왜의 삼백년간의 군사동맹은 침묵하고,

고구려와 왜의 군사연합은 외면하면서,

신라의 나당동맹만 반외세, 반민족이라며 비난한다.

 

신라김씨는 그들의 출자를 흉노(SHUNNU, 본뜻은 '하늘의 아들')로 보았고,

고구려, 백제는 부여로 봤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기존 삼한인들의 땅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다.

그당시로 본다면 백제는 신라보다 왜와 가까운 혈족이었고,

고구려 역시 신라보다 숙신여진족과 더 가까운 혈족이었다.

이것이 객관적인 관점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오늘날의 민족감정을 들이대며 신라를 비토하는 것은

개념을 상실한 짓이다.

굳이 이런 거짓논리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조선을 시원국가로 하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참된 한민족의 개념정립을

얼마든지 할수 있다. 그래야만 건강하고 확고한 미래지향적 민족사관이 나오는 것이다.

 

 

{고대에는 동일문화권이었더라도, 오늘날의 민족관념은 없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 49, 왜가 백제 장군을 동행하여 卓淳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 南加羅, 啄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 등의 가야 7국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古奚津 이르러 南蠻 耽彌多禮 쳐서 백제에 하사하였다. 백제왕 肖古 왕자 貴須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니 比利, 辟中, 布彌支, 半古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661 3월 이 달 唐人 新羅人 高麗 정벌했다. 高麗 우리나라에() 구원을 청했으므로 軍將 보내 䟽留城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唐人들이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新羅 서쪽 진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시기는 연개소문이 집권하던 시기인데, 연개소문도 구원군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민족관념으로 보자면 백제 의자왕, 연개소문, 김춘추 나라의 존립을 위한 전쟁에서 모두 외세를 끌어들인 반역자들이다.)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서기 400년경 백제와 왜의 연합인 백왜(百倭)연합이 한반도에 최초로 외세를 끌어들여 전쟁터로 만들었다고 광개토대왕비는 기록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관은 기본적으로 신라 비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신들에 유리한 부분만 왜곡 조작(허구적 삼한정벌론)하고,

불리한 부분은 철저히 침묵(신라의 일본정벌론)했다.

-허구적 삼한정벌론의 진실은 백제와 왜의 군사동맹으로

가야지방과 전라도 지방에 왜가 영향력을 행사한것이 실체-

-신라의 일본정벌론은 일본측 기록인 일본연대기에 응신22년 신라가 바다건너 왜를

공격하여 왜왕의 항복을 받고, 항복맹세로 백마의 목을 베어 백마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라는 항상 당하기만 한것이 아니라 일본을 정벌한 기록도 있고,

 신라가 수세에 몰리는 시기(4세기후반~5세기 전반)를 살펴보면

 백제와 왜와 가야의 군사동맹이 배후에 있음을 알수 있다.

 진흥왕때에는 백제, 가야와 왜 연합군을 물리치고 전성기를 구가한적도 있다.

 위대한 군주 김춘추도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왜와 고구려 연합군을 물리치자

 일본은 신라의 침략이 두려워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신라의 긍정적인 면을 외면하고,

부정적인 부분만 들추어 확대 재생산 하여 비토하는 것이 바로 식민사관의 틀이고,

신채호도 논리적 모순을 무시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같은 이중잣대로 구성된 민족사관은 건강한 민족주의 역사관이 설자리를 잃게 만든다.

객관적으로 보면 영웅 김춘추의 삼한일통은, 왜의 흔적을 이땅에서 완전히 제거했다는데 제일 큰 의미가 있다. 이후 신라와 당의 대립과 전쟁으로 발해가 건국될수 있었고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676~698년 전후)와 남북국시대로 넘어갔다.

결과적으로 나당동맹, 백제-고구려 멸망, 나당전쟁, 삼한일통, 발해건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신라만 당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이루었지,

당나라는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얻은 것이 없다.
삼국일통(나당전쟁승리에서 발해건국까지)은 그때까지 유동적이었던 민족의 범주를 형성하였고,

민족문화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김춘추는 자신이 만든 민족의 범주때문에 비난받는 모순된 역설을 만난다.

삼국전쟁에서 백제가 승리했으면 우리는 왜놈들하고 같은 민족으로 묶일수 있었고,

고구려가 승리했으면 오랑캐라 불렀던 숙신여진족하고 동일 민족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식민사관의 변형인, 현재의 민족사관은 통일신라의 강역을 일제 식민사관보다

더 축소시켜 놓았다.

18세기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卷9 疆域2)에는

발해가 건국되기 전까지 통일신라의 강역이 만주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76년 나당전쟁에서 패한 당이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다.

이것과 여러 사료에 근거해서 청나라는 만주가 통일신라땅이라 하였고

일제는 압록강 이남을 통일신라땅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국사교과서는 평양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땅으로 한정함으로써 영토문제에 있어서는

식민사관 보다 못하고, 신라 비토에 충실함을 보여준다.

나당전쟁 승리로 만주과 한반도 북부가 힘의 공백지대였으면 최소한 통일신라의 강역이

압록강 넘어 만주 일부까지라고 해야 한다.

 

또한 단골처럼 등장하는,

만주영토드립은 발해멸망과 이성계 때문이지 신라탓이 아니다.

신라의 후손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는 만주의 몇배가 넘는 중국의 절반을 정복하였다..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는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여진족들은 선조가 못났어도 조상탓을 하지 않았다.

후손들 스스로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여진족들도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만주가 우리땅이라는 환상은

몽골족, 여진족을 보면 그것이 허황된 구호라는 걸 알수 있다.

 

 

우리가 강대국이 못된것은 1000년 전의 신라때문이 아니다. 후손들이 잘못했기때문이다.

일본은 근대화와 개혁 개방에 성공하여 강대국이 되었고,

조선과 청나라는 실패하여 나라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신라탓이 아닌것이다.

몽골족이 조상탓했으면 절대 세계를 제패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몽골족이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위대한 조상을 가졌어도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지 조상의 몫이 아님을 역사는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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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 신라를 비토하는 역사왜곡과 조작의 하나는 :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를 뒤통수쳤거나 배신했다고 운운하는 왜곡이다.>

 

1) 

왜와 백제와 가야의 연합공격으로 신라가 멸망직전에 몰리자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해주었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준 이유는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의 공격으로 죽고 백제와는 계속된 전쟁

상태였는데, 당시의 동북아시아관계를 보면 [전진-고구려-신라]의 남북동맹 vs [동진-백제-왜-가야]의

동서동맹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라를 도운이유는 고구려 남방에 적대세력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또한 백제와 왜와 가야의 연합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구려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그후 고구려는 엄청난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였다. 장수왕때부터는 남진정책을 펴면서 신라와 백제를

압박했고, 한술 더떠 신라를 통째로 삼키려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464년 일본서기 웅략조(雄略朝) 8년 봄 2)

 

즉 고구려는 신라를 도와주는척하면서 딴맘을 품은 장수왕이 신라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친것이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었고. 신라를 통째로 삼키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장수왕이 신라의 역습을 당한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이 오랫동안의 신라-고구려의 동맹관계를 깨버린 것이다.

비난받아야 할 쪽은 고구려다.

 

2)

나제동맹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인 공수연합을 학자들이 명명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작동한 시기는 5세기 중반에서 후반 사이일 뿐이다. 6세기인 500년경부터는 나제동맹은 완전히 소멸한다. 따라서 진흥왕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이란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준지 150년 뒤인 551년에 고구려는 북으로는 돌궐, 남에는 신라와 백제가 공격하여 멸망직전이었다. 그때 진흥태왕이 고구려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고구려는 망할 운명이었다. 물론 진흥왕이 고구려와 화친한 것은 근본적으로 백제와 왜와 가야의 연합이 신라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면 이 세나라의 연합이 겨누는 칼끝은 신라가 될것을 알았기 때문에 진흥왕은 백제과 함께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다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2차 공격제의를 한 백제의 요구를 거부하고 고구려와 화친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도 멸망직전에 신라 진흥태왕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난 것이다.

 

541~554년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사를 보면

백제 성왕은 신라에 화친을 청해놓고서는 541년과 544년에 신라와 고구려를 압박, 견제하기 위해 왜와 가야를 불러들여 1,2차 사비회의를 개최한다.

548년에는 신라가 백제를 도와주고, 55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타서 신라는 고구려성과 백제성을 모두 차지해버린다.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해 신라는 한강상류를, 백제는 한강하류를 차지한다. 552년 백제가 신라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2차 공격을 제의하지만 진흥왕은 거부한다.

이에 백제는 신라가 고구려와 화친한 것을 알고, 왜로 건너가 신라를 기습공격하기 위한 군사원조를 요청한다. 그러던 중에 신라는 백제가 점령한 한강하류마저 차지한다. 이사건을 일본서기는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고 기록하고, 삼국사기에는 공격기사는 없고 단지 한성을 취()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백제는 신라가 공격해올때 전략적 차원에서 한강하류에서 후퇴한것으로 볼수 있다. 왜냐하면 한강하류를 빼앗긴후에도 백제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어 유화제스처를 취하고서, 553년에 고구려를 단독공격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554년 백제와 왜와 가야가 연합해서 신라를 공격하다 백제 성왕이 전사한다.

종합해보면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은 모두 처음부터 서로를 믿지 않았다. 필요시에만 서로가 적이면서도 또다른 공동의 적국을 공격하기 위해 연합했을 뿐이다. 그리고 신라도 고구려가 망하면 백제와 왜와 가야의 연합이 신라를 칠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제2차 연합공격 제의를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서 거부했던 것이다.(삼국유사)

 

즉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것처럼 여우의 간지와 사자의 용맹을 가지고서 치열한 워게임(war game)을 했을 뿐이다.

진흥왕과 성왕의 술수가 난무한 워게임에는 애시당초 배신이니 뒤통수니 하는 말은 존재할수 없는것이다.

결론은 신라와 진흥왕에 대한 배신 운운은 식민사관의 잔재인 신라 비토와 맞물려서 나온, 왜곡조작된 역사이고 잘못된 상식이다.      신라 진흥왕의 배신은 역사적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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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 비판>

  (역사가로서 신채호 비판)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우리의 역사는 만주를 무대로 하는 주족(主族)인 부여족이 객족(客族)으로서의 외래족인 중국족과 

토착족인 한족(韓族)을 제압해 간 역사로 보았다 

그가 부여족 주족론을 주장하며 삼한족과 기타 종족을 제압했다는 식의 인식은 

우생학적, 인종주의적 관점에 기반한다. 

이는 일제가 우리를 열등민족으로 본 식민사관과 궤를 같이 한다. 비난하면서 답습하는 경우이다. 

그의 주족-객족론은 부여족 정통론으로서, 

신채호식의 논리라면 흉노족(훈족) 신라가 부여족인 고구려, 백제와 토착족인 한족(韓族)을 제압한 것이 통일신라인 것이다. 

 

역사가로서 신채호는 

“김춘추나 김부식을민적(民賊)’·‘공구(公仇)’로서 가혹한 비판을 했음에도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에 대국이라며 사대하고, 

나라 이름도 화령과 조선 중에 명()이 정해준 조선으로 한 것에 대해선 침묵했다. 

일본의 식민사관과 같이 신라비토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혐신라와 맞지않는 

역사적 사건들은 누락시키고 무시하였다.

 

 

신채호는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주장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묘청의 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며 왜곡하여 미화포장하고 김부식을 비난했다.

하지만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준비되지않은, 권력을 향한  퍼포먼스였다.

급하게 하려다 보니,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을 이용하여 현혹하였고, 신비한 이적을 조작하고

허풍을 떨다가 발각되어서 인종의 신뢰를 잃게 되니까,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고려사 권 127)

한마디로 묘청은 혁신가라기 보다 수단을 위해선 조작도 서슴치 않는 요승이었다.

신채호의 관점이 진실성이 있었다면,

준비되지 않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자주(自主)퍼포먼스에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 타이틀을 부여해선 안되었다.

거대제국 원()이 쇠락하고 요동이 힘의 공백상태에 있을 때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에서 정해준 나라이름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으로 의미 부여를 하였어야 이중잣대 논란이 없는 진실성

을 가졌을 것이나 그렇지 못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또한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조선과 부여, 발해역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지만,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쓴것이지 조선통사를 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라의 후예 아골타가 세운 북쪽의 금나라가 발해를 이은 나라로 존재하는데,

오늘날의 민족감정이 아닌 그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삼국사기에 발해사를 담는 것은

남의 나라(금나라) 역사를 탈취하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부식은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유교적 합리주의자로 봐야한다.

 

신채호는 식민사관을 비난하면서도 신라사와 김춘추, 김부식 같은 인물에 대해선

식민사관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이성계에 대해선 이중잣대로 일관한다.

 

신채호 이래로 왜곡된 신라사와 김춘추와 김부식 인물론은 식민사관의 아류이므로

객관적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채호는 식민사관과 같이 신라사를 죽여서

오도된 민족사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역사가로서 신채호의 잘못은 만주영토에 대해서도 이중잣대와 논리적 모순을 드러냈다는데 있다.

신라가 당을 요동으로 몰아내고 발해가 만주에서 건국되었음에도 만주상실을 신라때문으로 몰아갔고,

반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요동정벌을 포기하고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에 대해선 침묵하고 외면했다.

논리의 일관성이 없다. 

  

조선상고사에서는 

“부여족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중시하였고”, 신채호의 저술의 저변에 흐르는 관념은 친백제 성향을 보인다. 조선상고사에서 장수왕의 음모, 신라의 음모 그리고 김유신의 음모라는 단어선택을 봐도 그렇다. 

장수왕과 신라와 김유신의 행위가 음모라면 그 반대편에 섰던 백제의 행위는 정당한것으로 보는 것이다. 

삼백년간 왜놈과 결탁한 백제의 행위는 음모가 아니라 정당행위인가 신채호에게 묻고 싶다. 

역사가로서 신채호의 잘못은 외세, 민족에 대하여 이중잣대를 적용했다는데 있다.

 

신채호가 근대 민족주의 역사관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반작용으로 나타났기에 잘못된 괴이한 민족사관이 되고 말았다. 

그에 따른 논리적 오류와 이중잣대 그리고 실증주의를 강조한것과는 달리 객관성을 상실한 

오도된 내용이 너무나 많다. 특히 오늘날의 혐신라는 신채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역사가로서 신채호의 잘못은,

신라사를 제대로 복원하여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하는데 식민사관과 똑같이 신라사를 죽여서 

오도된 민족사관을 세웠던 것이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논리적 오류투성이의 근대민족사관은 이제 타파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을 극복하는 새로운 민족사관의 정립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임나일본부과 삼한정벌론이

실제는 백제가 왜를 한반도에 끌어들임으로써(군사동맹), 

왜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나타난 것을 왜곡조작한 것이고,

그때문에 신라가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받을만큼 열세에 놓이게 되었음을 밝히고,

이러한 왜의 세력을 축출한 것이 일차적으로 진흥왕이고 

완전히 몰아낸 것이 신라의 삼한일통임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청나라 만주원류고에서는 최종적으로 나당전쟁의 승리로 당이 요동으로 물러나고 발해건국 전까지 신라가 만주와 한반도를 차지한것으로 본다 

신라사에 대한 주체적 관점이 신채호가 아닌 청나라에서 나온 것은 아이러니다 

신라사에 대한 주체적 관점으로 보는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676년 나당전쟁승리 ~ 698년 발해건국전후) – 남북국시대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역사관은 만주와 한반도가 중국과는 다른 공동역사체임을 밝히고 있는 바, 

이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결국 신라비토에 집중한 신채호의 관점과는 반대로,

신라사에 대한 주체적 복원이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을 극복할수 있는 또하나의 

중요한 중심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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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일본의 관계>

 

신라 가야인들이 한반도에서 1차 도래인으로 왜로 많이 건너갔다.

그래서 왜왕이 제사지내는 축문에도 경상도 사투리가 들어있고,

현존 일본신사의 절반이 신라 가야 신사이다.

일본건국신화의 주무대가 경북 고령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도 있다.

2002년 일본 국립유전자협회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 유전자 구성비율 중 4분의 1이 한국 고유타입이라고 밝혔다.

고대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이동 가능했을 것이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신라와 가야와 왜 사이에 문화와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경상도말과 일본말이 유사하게 들린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2차 도래인들은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이었다.

이때문에 일본어의 어휘는 백제와 고구려 계통이 많은 것을 알수 있다.

2001년에는 일왕이 '고대에 왜왕의 모계(母系)가 백제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또한 일본문자 가타카나의 원형이 신라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전자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지만,

정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나라가 일본이다.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신라는 항상 당하는 나라로 그려졌는데,

주체적으로 보면

일본이 세계2차대전때 항복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침략받아 항복한, 일본측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신라이다.

비록 신라가 서기400년 경 왜의 침략(백제와 가야도 왜의 동맹군)을 받아 멸망직전에

광개토대왕의 구원을 받았지만

150년 뒤인 진흥왕때는

멸망직전에 놓인 고구려까지 영토할양의 암묵적 동의를 조건으로 구원해주었으며,

백제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고,

함경도부터 곳곳에 진흥태왕이라는 글귀를 새긴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다시 150년 뒤에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려와 왜의 연합군을 당나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왜의 흔적을 이땅에서 완전히 제가하였다.

그후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신라와 당나라는 전쟁을 하며 대립하였다.

나당전쟁과 대립으로 발해가 건국될수 있었고

삼국시대는 통일신라시대(676~698년 전후)와 남북국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신라통일후 일본은 신라의 침략이 두려워 성을 쌓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일본의 식민사관이 던져준 미끼만 물고 신라를 비토하는 역사관은 사라져야한다.

있는 역사만 제대로 밝혀도 신라는 역경을 헤치고 승자가 된 나라이다.

그 중심인물이 위대한 군주 김춘추이다.

 

 

<일본은 허구적 임나일본부와 삼한정벌론을 역사적 사실처럼 왜곡 하는데,

우리의 국사교과서도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신라의 일본정벌론을 실어야 한다.

식민사관의 틀에 갇혀 신라를 축소, 왜곡하는 국사교과서는 개정되어야 한다.>

 

『 1.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 "동사강목"( 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

 

"신라는 1만 리의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의 맹세를 받았다."

 

2.김세렴 "해사록"

 

"倭王 응신(22)때 신라측이 명석포에 들이닥쳤다.... 일본이 강화와 군대해산을 요청함... 응신 22년은 유례왕 8년이었다."

 

3.日本年代記

 

"응신 22년에 신라 멀리 일본국의 내해에까지 쳐들어와 서울인 대판(오사카)에서 겨우 100리 떨어져 있는 명석포에서 응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조선 광해 9년에 덕천 막부를 방문한 통사관 이경직이 당시 열람한 일본 비장 도서의 하나인 일본연대기를 부상록에 옮김)

 

3.일본 덕천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창 일본"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4.일본서기

 

"응신 22,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 세력에게 응신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문정창은 이 어우별 세력을 신라군으로 추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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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와 삼한정벌론의 허구>

 

임나일본부의 근거로는, 1)광개토대왕 비문, 2)중국 남조 송나라가 왜에 준 작위기사, 3)전라도에서 발견된 왜식 묘제인 전방후원분 13기, 4)양직공도(梁職貢圖, 521) 신라제기(題記)에 나오는 "惑屬韓屬倭" 라는 기록 등이다.

역사적 사건의 참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교차검증과 유물,유적의 상호비교를 통하여

진실여부를 가려야 한다.

예를 들어 552년 북사 권94 고구려전에는 북제의 사신으로 온 최유(崔柳)가 양원왕을 폭행 했지만

주위 신료가 숨을 죽이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사죄하며 그 명에 따랐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기록은 북사에만 나오고 다른데는 전혀 없다.

학자들은 이 기록이 당시 상황과 여러가지 근거를 들어 조작된거라고 본다.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사실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1)광개토대왕 비문은 멸실된 글자와 더불어 해석이 크게 엇갈려 있지만,

크게 보면 4세기 후반에 백제와 왜의 통교로부터, 본격적으로 왜의 군사가 한반도에 출몰하여,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왜와 통교를 처음 시작한 근초고왕때에는 문화적 우위를 바탕으로 왜의 군사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백제가 강성해졌지만, 이후 바로 상황이 역전되어 백제가 왜에 인질을 보내는 등 군사동맹의 힘의 역학

관계가 왜(倭)로 기울어 졌다.

즉 백제와 왜의 군사동맹이 한반도에서 왜의 군사력으로 나타났고, 이것을 일본이 왜곡 조작한 것이 임나일본부이다.

 

 

2)중국 남조 송나라가 여러 번 거부하다가 왜에 삼한을 포괄하는 듯한 작위를 준 배경을 보면

실체가 없는 자기들끼리의 주고 받기 임을 알수 있다.

그 배경은 "송나라가 450년 북위로부터 공격받아 멸망의 위협을 받고나서, 다음해 451년,

그리고 송이 제나라에 멸망(479)하기 전인 478년에 왜에 작위를 내렸다.

이것을 보면 송나라는 위기에 처했을 때, 현실적인 연합의 필요에서 무시할수 없는 군사력을 가진 왜에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작위를 내린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451년과 478년 사이인 462년에는 똑 같은 책봉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438년 왜() ()왕이 자칭 ‘使持節都督倭百新羅任那秦韓慕韓六諸軍事安東太軍倭’라고 부르며 조공을 보내면서 책봉을 요구하지만 송나라는 거부한다. 4월에 송나라 문제(文帝)가 왜왕에게 安東将軍倭国이라는 관직을 내려준다.( 송서 文帝紀, 国伝)

 

443년 왜왕 제()가 조공을 보내와 같은 요구를 하지만 송은 거부하고 安東軍倭이라는 관직만 내려준다.

 

451년 왜왕 제()安東 더불어 백제를 빼고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諸軍事에도 임명된다.(송서 文帝紀, 国伝)  앞서 몇차례 거부당하다가 처음으로 책봉받는다.

 

462년 왜왕 흥() 451년과 같은 책봉요구를 하지만 송나라는 거부하고,

       安東軍倭으로만 임명한다.

 

477년 왜왕 무()가 다시 자칭 使持節都督倭百斉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安東太将軍倭国王라 칭하며 송나라에 조공을 한다.

 

478년 왜왕 무()가 다시 책봉을 요청해와, 송 순제(順帝)에게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諸軍事安東太軍倭王라는 관직을 하사한다. 479년 송나라가 멸망한다. 』

 

 

남제서(南薺書)에 의하면 479년 대가야왕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국장군은 3품의 장군호로 고구려의 정동대장군, 백제의 진동대장군, 왜의 안동대장군 보다는

1품이 낮았다. 이는 왜왕 진()이 남송에 견사하여 안동장군호를 받은 것이나, 그 신료들의 작호

제수를 요청했을 때, 13인이 보국장군 이상의 장군호를 받은 사실과 비교하면 가라왕 하지의

국제적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견사하여 백제왕의 신료들에게 제수를 요청하여 받은 장군호 가운데 보국장군 이상이 5명이나 된다.”

하지만 대가야가 국력의 차이로 백제나 왜보다 낮은 칭호를 받았다 하더라도,

438년 왜()가 안동장군왜국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처럼 엄연한 한국가의 왕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 백제의 신료들이 받은 장군칭호 뒤에는 왕()의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또한 전남 순천 운평리 고분군에서, 500년 전후로 추정되는 순천 지배층의 무덤에서 일본계 유물이 아닌 대가야계 유물이 대량출토된 것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타(지금의 순천)’ 등 임나사현의 기사를 근거로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실증적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3)전라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들의 축조시기는, 학자들은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로 보고 있다.

여기서 발견된 부장품들은 왜색이 짙지만 백제적 요소 또한 강하다고 한다.

이시기는 백제와 왜가 군사동맹에서 더나아가 결혼동맹을 통해 인척관계가 됨에 따라,

한층 더 강한 군사동맹체제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전라도에서 나타나는 전방후원분은 백제가 왜와의 군사연합을 통해 불러들인

왜의 군사력을 증거일뿐이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기 전라도 동쪽지역인 순천의 지배층 무덤에는 대가야계의 유물만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 일본내에도 한국식 묘제와 유물이 나오듯이, 한국에서 왜식 묘제와 유물이 출토된다고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문화와 군사, 인적교류의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479년 대가야왕 하지가 중국 남제에 조공하여 보국장군 본국왕이라는 작위를 수여받았고, 500년 전후의 전남순천지역의 지배층무덤에서 대가야계 유물만 집중출토된 점으로 볼때, 임나일본부는 실체가 없고 왜가 단순한 군사연합을 왜곡날조하여 만들어낸 허구임을 알수 있다.

 

 

4)양직공도(梁職貢圖, 521년) 신라제기(題記)에 나오는 "惑屬韓屬倭"라는 기록은

실체없는 왜곡된 인식의 반영이라고 봐야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왜에 인질을 보냈다고 나온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에도 인질을 보냈고, 고구려 군대가 신라 수도에까지 주둔을 했음에도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기록은 없고, 왜(倭)처럼 속국 운운하며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반대로 왜는 백제와의 연합으로 일정시기 신라에 대한 우위를 점한 부분을 가지고,

과장 왜곡 조작하여 중국 송나라에 가서 백제까지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가 전부 자신들 속국이라는

허세를 부렸다.

백제와 왜의 군사동맹의 결과, 근초고왕때에만 왜(倭)보다 우위에 있다가,

곧바로 힘의 균형이 왜(倭)쪽으로 역전되었고,

이러한 백제와 왜의 군사연합이

광개토대왕이 멸망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하러 5만군대를 보낸 이유이다.

한편 신라가 고구려와 왜에 모두 인질을 보낸것은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표명인 것이다.

(이시기 신라가 인질을 보낼만큼 어려워 진것은 백제가 왜의 군사력을 이땅에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521년 신라는(법흥왕 8년) 백제사신(무령왕 21년)을 따라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때 양직공도 신라제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양서 신라전은 당시에 신라에는 문자가 없고, 나무에 새겨 전달표식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

다. 그러나 이전에도 신라에 한자 문화가 분명히 실재하고 있어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이점에서 백제

사신의 의도적인 허위보고에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때 백제사신은 양에게 백제에 종속하는

소국 9개국을 보고했는데, 그가운데 신라를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이성시 교수)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왜로 둘러싸여 중국과 직접 교류하기 힘들었는데,

처음에는 고구려를 통하여 사신을 파견했었고,

521(무령왕 21, 법흥왕 8)에는 백제를 통하여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다.

백제는 신라사신이 같이 갔음에도 언어소통이 안되는걸 기회삼아 신라가 백제의 속국이라고 거짓을 말했는데, ()는 더 오랜기간(438~)동안 백제를 포함하여 삼한 전체를 속국이라고

허세를 부려 왜곡 조작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양직공도 백제사신

 

 

양직공도 왜국사신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왜가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해오고, 조공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보는데,

속국이 아니기 때문에 왜가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다.  속국이라면 왜가 그렇게 열심히 공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양직공도 신라제기(題記)(그림은 없고 내용만 전해진다)에 나오는 "惑屬韓屬倭"라는 기록은,

이러한 왜곡된 정보와 책봉요청과 거부의 반복을 통한 80여년의 시간(438~521)  만들어낸,

잘못된 왜곡조작된 인식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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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일본서기의 주된 논조는 과장, 왜곡, 조작으로 일관된 혐신라이다.

일제 식민사관의 초점은 기본적으로 신라 비토이다.

신채호 이래로 형성된 민족사관도 기본적으로 신라 비토가 초점이다.

왜그럴까.

현재의 민족사관은 일제 식민사관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식민사관의 변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사관은 왜곡 조작으로 조상탓을 하게 만들고 미래도 그럴것이다는 주장이다.

일본서기와 일제 식민사관과 현재의 민족사관의 공통점인 신라비토를 깨트려야

거짓논리가 없는 민족사관을 새로 쓸 수 있다.

 

모순된 민족관념으로 자기최면을 걸지 않더라도

우리역사는 동이족 영역의 대표국가인 고조선부터 시작하고

신라통일이 그때까지 유동적이었던 민족의 범주을 형성하였고

조선의 멸망과 현재의 분단은 그당시 후손들 잘못이지

신라탓으로 돌리는 궤변이 없어져야

건강한 민족사관을 새로 정립할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몽골족은 조상이 못났어도 세계 최대 제국을 만들어 냈고,

그런 잘난 조상을 두었어도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결국,

조선멸망과 이나라가 약소국이 된 원인이 신라탓, 조상탓으로 돌리는

거짓된 자기최면에서 깨어나야,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식민사관의 틀을 부수어야,

새로운 역사는 후손들의 몫임을 자각해야,

논리적 모순이 없는, 거짓논리가 없는

진정한 민족주의 역사관을 논할수 있는 것이다.

 

 

<모순된 민족, 외세, 영토관념으로, 신채호 이래로 형성된, 거짓논리의 현재의 민족사관이

신라 비토에 충실하여, 통일신라의 강역이 18세기 청나라나 일제 식민사관보다 못한 대동강 이남으로 한정시켜 놓았다.>

 

                    <청나라 만주원류고의 통일신라 강역(좌)과 일제의 통일신라 영토(우)>

 

거짓논리의 모순된 민족사관따라 쓰여진,

현재의 국사교과서는 식민사관의 변형으로, 신라 비토에 있어서는 식민사관보다 더하다.

잘못된 민족, 외세, 영토관념을 적용하여 신라 비토에 충실하다.

18세기 청나라 사서 만주원류고는 통일신라의 강역이 발해 건국전까지

한반도와 만주전역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 식민사관조차 통일신라의 강역이 압록강 이남이라고 하는데,

자랑스런(?) 우리의 국사교과서는

통일신라(나당전쟁승리부터 발해건국전까지)의 강역을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시켜 놓았다.

남의 나라보다 못하다.

지금은 새로운 민족사관과 국사교과서가 필요한 시대이다.

 

일본서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식민사관과

현대에 와서 시작한 중국의 동북공정의 핵심중 하나는 신라사에 대한 왜곡 조작이다.

우리역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신라사를 비틀어 왜곡 조작하고 자기들 논리에 끼워맞추는데,

오늘날 우리나라 저변에는 이를 추종하는 자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유독 신라사에 대해서만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는 자들이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욕하는 위선적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 *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중의 하나는 청나라 사서인 만주원류고의 역사관이다.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과 다른 공동역사체임을 선언한 만주원류고는 동북공정의 아킬레스건이다. )

( * 임나일본부와 삼한정벌론이 허구임을 밝히고, 동시에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신라의 일본정벌론'과 통일신라 강역의 주체적 시각을 교과서에 수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신라사에 대한 식민사관과 동북공정 추종자들을 극복하고

신라사를 우리의 주체적 관점으로 복원하는 길만이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깨트리는 또하나의 중심축임을 알아야 한다.

 

 

 

 

 

 

 

출처 : 군대·무기
글쓴이 : 들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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