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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모두 몇개섬 일까요? 독도의 역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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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모두 몇개섬 일까요?

 

독도는 모두 91개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도는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1개로 구성된 외로운 섬이 아니고
동도와 서도 만으로 구성된 2개의 부부섬도 아니고
인터넷에 나와있는 것과 같은 36개로 구성된  섬도 아닌
모두 91개의 섬이 모여 있는 대군단이라고 합니다.
 
2005. 6. 28일 바른역사기획단 독도대응팀의 국정브리핑자료에 의하면
독도는 91개섬(동도 및 서도 포함)이 모여있다고 합니다!!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위치한 섬으로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입니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룹니다.
동도는 해발고도 98m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m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 있으며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하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고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섬으로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등 계속해서 독도에 대해 억지 주장을 하고 있죠!
 
독도는 동도와 서도 사이의 형제굴,
동도의 천장굴 등을 비롯한 해식동굴과 해식대 및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바위 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간이선착장을 만들었으며,
섬 주변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함에 따라
많은 어족이 모여들어 어장으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1954년 8월에 건설한 등대도 있습니다.

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등 이곳에 모여드는 희귀조를 보호하기 위해
1982년 11월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독도가 바른역사기획단 독도대응팀에 의하면
알려진 것 보다 6551㎡ 넓고 딸린 섬도 57개 많다고 합니다.
총면적 18만7453㎡이고, 섬은 모두 91개(동도, 서도 포함)라는 것입니다!!
 
동북아의평화를위한바른역사정립기획단은
당시 독도의 높이, 면적, 부속도서의 개수 등 정부표준 독도현황을
2005년 6월 28일자로 고시했습니다.

당시 조사된 독도현황은
최신 GPS 기법과 항공사진 등을 통해 새로 측량한 것이러고 합니다.
부속도서는 1961년 독도를 처음 등록할 때 원시적인 장비로 인해 정확한
사실측량이 불가능했던 것을 이번에는 만조시 수면위에 있는
면적이 1㎡ 이상인 모든 암석을 대상으로 정확히 재측량했다고 합니다.  
 
또 동북아의평화를위한바른역사정립기획단은
이번 고시와 함께
Dokdo, Dongdo(East Island),Seodo (West Island)등
독도관련 로마자 및 영문표기법도 확정·고시했다고 합니다.
 

 

출처:
 
독도의 역사


1/5000 독도지도


"독도"를 한국영토로 표기한 1894년도 佛(프랑스)지도

[개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딸린 섬.
위치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
면적 : 0.186㎢

[본문]
면적 0.186㎢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6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m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m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 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섬으로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Li ancourt)', 영국에서는 '호넷(Hornet)'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

섬은 동도와 서도 사이의 형제굴, 동도의 천장굴 등을 비롯한 해식동굴과 해식대 및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바위 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간이선착장을 만들었으며, 여러 곳에서 수질이 좋은 용천(湧泉)이 발견되어 식수 문제도 해결되었다. 섬 주변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함에 따라 많은 어족이 모여들어 어장으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1954년 8월에 건설한 등대가 있다. 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등 이곳에 모여드는 희귀조를 보호하기 위해 1982년 11월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해조류(바다제비·슴새·괭이갈매기) 번식지로 지정하였다.


[독도연표]

.512년 : (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930년 : 고려태조 13년 고려에 귀속
1401년 : 공도정책
1425년 : 우산도로 호칭
1454년 : (단종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중 권 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에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469년 : 삼봉도로 호칭
1693년 : 자산도로 호칭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왜인발견퇴거 안용복이 은기를 거쳐 도일 덕천관백에게 출어금지서계 징구 울릉도 일본어민 퇴각
1697년 : 3년마다 정기적인 치안 확보
1881년 : (고종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 (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년 : 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발표
1905년 :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07년 :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 :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14년 :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1946년 : 1월 29일 SCAPIN 제677호 -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2년 :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년 :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 조난어민 의령비 제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각서 발송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 4월 27일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 :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 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수여
1980년 : 최종덕 독도 전입
1981년 : 헬리콥터 이착륙 시설 설치
1986년 : 7월8일 동인의 사위 조준기(61. 3. 20 생) 주민등록 전입 (가족 3명) 6개월간 어로작업목적
1991년 : 11월 17일 김성도(56세) 외 가족 (1명) 전입(서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 (동도)
1993년 : 레이더 기지 설치
1996년 : 접안시설공사 착공
1997년 : 울릉읍 도동에 독도박물관 건립

[고대사로 살펴본 독도]

삼국시대 ~

1)512년 6월 (신라 22대 지증왕 13년)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 섬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 라는 하나의 독립국(獨立國)이 있었다.

2)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다.

3)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신라에 귀속시켰다.

4)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시대 ~

1)930년 (고려 태조 13년) 고려 태조13년 우릉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사절로 백길,토두 두사람을 보내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백길에게는 정위,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고려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이다.

2)1018년 (고려8대 현종 9년) (우산국이) 동여진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곧 조정에서 이완구를 시켜 피난민을 우산국으로 돌려보내고 농기구와 이물품을 전달

3)1022년 (고려8대 현종 13년) 동여진의 침입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을 예주에 살도록 했다.

4)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울릉도 독도에서 → 조정에 공물을 바침

5)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우산국대신 → 우릉(于陵 또는 羽陵)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우산국주(宇山國國)대 신 우릉성주로(于陵城主)로 바뀜. 이는 우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이 완전히 중앙정부의 직할아래 들어갔음을 의미함.

6)1141년(고려 17대 인종 19년) 강원도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嵌倉使)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과실과 나뭇잎을 채취하여 조정에 바쳤다.

7)1157년 (고려 의종 11년) 명주도 전중내급사 김유림 파견 → 섬의 중앙 꼭대기 (지금의 성인봉)에서 동으로 1만여보, 서로 1만3천여보, 남으로 1만 5천여보, 북쪽으로 8천여보에 달하고, 마을 7군데 등 보고.

8)1197년 (고려 명종 27년) 동쪽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사짓게 했으나 풍파가 심하여 다시 서쪽으로 이주.

9)1242년 (고려 고종 29년) 실력자 최이에 의하여→울릉도 이민 사업 실시 → 풍랑등으로 시민사업 실패거듭

조선시대 ~

1)1416년 (태종 16년)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 공도 정책 발표

2)1417년 (태종 17년) 삼척사람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 → 울릉도 파견 → 15호 86가주민이 있음을 발견 → 3명만 안무사에게 설득되어 육지로 옮김→여기서 우릉도를 공도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유중에 주목할 점은 "강원도에서 무릉도까지 풍랑 속의 머나먼 뱃길로 수장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무릉도에 와서 사람이 살게 된데 는 고려말 나라의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여 이 곳으로 왔기 때문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425년 (세종 7년) 태종 뒤를 이은 세종도 공도정책계승 → 김인우를 역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파견. 여기서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등 2개가 있다는 표현이 분명함.

4)1438년 (세종 20년) ① 울진 사람의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순찰경차관으로 파견 ② 남녀 66명을 수색하여 본토 송환 → 본국 모배죄 ③ 주모자 김안 → 교수형,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음.

5)1441 (세종 23년) 만호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지시 → 70여명 송환 , 공도정책 계속 이후 →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았던지 육지와 몇년동안 소식이 두절됨 → 그 후 새 섬이 있다는 설이 나돔.

6)요도/신도설 그리하여 공도가 된 후 사람들이 항해 중 울릉도(무릉도), 독도(우산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섬이란 신도설, 요도설이 떠돌았다. 조정에서 신도/요도를 확인하려 했다. 그 확인 기록이 바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다고 보면 된다.

7)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 현조에 → 우산과 무릉의 두섬이 울진현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두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8)삼봉도 세종 뒤를 이은 성종 때도 해안주민들 사이에 강원도 경내에 속하는 동해 한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갔다.

9)삼봉도 수색 조정에서 파견된 강차관 박종원이 삼봉도에 다녀왔다는 김환경과 함께 삼봉도 수색했으나 실패 → 삼봉도는 독도이다.

10)성종실록 김자주의 삼봉도(독도) 묘사 기록 - 25일에 섬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북쪽에 세바위가 나란히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나란히 섰으며 다음은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바다와 섬사이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30여개가 서있는데 의심나고 두려워 그 섬에 접할 수가 없어 도형을 그려 돌아왔다.

11)1531년 (중종 26년)「신증동국여지승람」의 45권 울진현군에 →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위의 나무와 산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 신라 지증왕 13년이래 → 세종실록 지리지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음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 틀림없음.

12)1693년 (숙종 19년) ① 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서계 보내옴 →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 요청 ② 조정에서 →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 ③ 영의정 남구만 → 형세조사차 삼척첨사를 울릉도에 파견

13)1693년 (숙종 19년) 안용복, 박어둔 등 40여명의 조선어부는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 발견 → 추방을 위한 격투 (독도 사수 - 안용복 장군편 참조)

①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법월경을 스스로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었다. ② 일본 도쿠카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두섬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휘하의 관백과 태수에게 쓰게 했을 만큼 독도의 조선 영유권 존중. ③ 조정은 울릉도 수토제도를 채택하고 3년에 한번씩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관원을 보내 순검케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주권은 변함없이 행사함.

14)1697년 2월 (숙종25년)「신증동국여지승람권 45여지고 일본 막부 →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공식인정

15)1699년 (숙종 25년) 안용복 장군은 일본 에도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음

16)1900년 10월 25일 (고종 37년) 칙령 제 4호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하고, 강원도는 울진현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설치하면서 군청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섬목앞의 실제 죽도이고, 석도는 → 석 즉 돌 → 독도를 의미한다. <독도의 독은 홀로 (독)이라고 하고 돌 (독)이라고도 한다.>

17)1904년 8월 23일 (고종 41년) 조일 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 부대 설치

18)1905년 5월 17일 (고종 49년) 일본 정부 → 독도를 죽도라 변칭하고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기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에 합병 선언

19)1905년 11월 17일 (고종 49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국권 상실

외국에서 본 독도 - 리 앙쿠르

1) 1787년 5월 (정조) - 프랑스 - 라 페레즈 대령(la perouse) - 다 즐레(울릉도) - 독도(부솔:Boussole)

2)1797년 - 영국 - 브로오트(Broughton) - 울릉도(아르고노트:Argonaute) - 그 뒤 유럽서 - 울릉도를 다즐레와 아르고노트 2가지로 기재

3)1840년 - 독일 - 지볼트(Siebold) - 일본지도를 만들면서 - 울릉도를 아르고노트 섬 - 독도를 다즐레 섬에 맞춰서 기재. 그 뒤 - 유럽지도 -아르고노트 섬은 없어지고 다즐레 섬만 남았다.

4)1849년 (현종15년) - 프랑스 - 고래잡이 베인 리 앙쿠르(Li ancourt)호가 독도를 발견 - 리 앙쿠르 록스(Li ancourt Rocks)라 명명 (Rocks는 바위의 복수 단어임) - 섬이라기보다는 2개의 바위 덩어리로 봄.

5)1854년 (철종 5년) - 러시아 - 푸차친(Putiatin) 해군 중장이 이끄는 군함 팔라다호(Pallada)가 독도를 발견하고 - 마블라이 앤드 올리부차록스(Manalai & Olivntsa Rocks)라 명명.

6)1855년 - 영국 - 중국파견함대 소속 - 호넷(Honet)함의 해군 중령 - 라르시스(Charlses c. Farsyth)의 지휘 아래 - 독도 측정 관찰 - 호넷롯스라고 명명(러시아와 영국도 독도를 열암으로 보았음)

7)서양지도에서는 - 독도를 "리 앙쿠를"라고 해양지도에 기재되었음.

8)일본은 - 1900년 이전까지는 - 독도를 "리 앙코르도 로코스" 또는 "리앙 고르도 열암"이라고 불렀다.증거 1 - 1867년 만든 - "대일본국 연해 약도" 와 1870년 만든 "대일본 사신 도전"이라는 지도에 -' 리 앙코르도 로크스" 또는 "리앙 고르도 열암"이라고 불렀다. 증거 2 - 1880년 (고종 17년, 명치 13년) - 독도와 울릉도를 조사한 일본군함 - 야마키는 - 울릉도를 마츠시마 - 독도를 마츠시마에 좀 떨어지게 표시하고 "리앙고르도"라고 보고한 기록이 있음.

9)오늘날 독도를 리 앙쿠르(Li ancourt)라고 표시하는 나라가 있음 - 한일간의 분쟁지역으로 - 인정하는 셈. -- 한일 독도 분쟁에 끼어 들고 싶지 않다는 계산임



출 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tokdokorea.co.kr/page/his-1.htm (독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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