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前대통령 서거]민주화·대북 화해정책… 현대사에 큰 획
시련·영광 점철된 한국정치 50년의 거목
경향신문 | 최우규기자 | 입력 2009.08.18 16:36 | 수정 2009.08.18 16:41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돌아갔다. 영욕과 부침, 환희와 좌절리 교차한 50여년의 정치 역정은 한국 민주화 투쟁의 신산한 역사를 함축하고, 분단 극복의 도정을 담았다.
한겨울 풍상을 이겨내고 이른 봄 꽃망울을 터트린 '인동초(忍冬草)'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시련과 영광이 점철된, 민주주의와 남북화해를 위한 그 도저한 여정을 끝냈다.
# 하의도 섬 소년과 청년 실업가
김 전 대통령은 섬 아기였다. 1924년 1월6일(음력 1923년 12월1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의도는 섬이지만 농업이 발달했고, 일제에 의한 수탈이 심해 저항하는 농민들의 소작쟁의 운동도 전개됐다. 부모는 일본 지주의 땅을 소작하던 중농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고향마을 이름 '후광'을 호로 삼을 만큼 그곳을 사랑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집념과 비판 의식은 어린 시절 항일 심리에서 싹텄다고 한다. 소작료를 강탈해가는 일본인을 보면서 반항심이 생겼다.
하의도에서 소년 김대중은 서당을 다니다 34년 4년제 하의공립보통학교(현 하의초등학교)가 생기자 동생과 함께 입학했다. 학교성적을 적은 통신부에는 그가 36년 부급장, 부조장으로 임명된 게 나타난다.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본 부모는 37년 전 재산을 처분해 목포로 이사해 여관을 경영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제일보통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기에 "부모님이 내 교육문제를 놓고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가 기억난다"며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게 한 첫 걸음은 부모님의 교육열"이라고 회고했다.
38년 조선어 수업이 폐지된 것은 소년 김대중에게 큰 상처를 줬다. 99년 낸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학교에 있는 내게 볼 일이 있어서 찾아오셨는데 일본말을 못했다. 나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면 안되었기에 아무 말도 못해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헤어졌다. 학교가 끝나고 아버지에게 무슨 용무였는지 여쭸지만 아예 말씀을 안했다. 더 이상 여쭐 수도 없었고, 그게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적었다.
그는 39년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고,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초기에는 1, 2등을 다툴 만큼 성적이 좋았고 웅변, 연설에도 흥미가 있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일본인들과의 갈등 등을 이유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반일 작문이 문제가 돼 반장을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 44년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서울고등사범학교와 만주 건국대학에 합격했지만, 일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호적상 생일은 25년 12월3일로 돼 있다. 일제 징용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부모가 목포상고 4학년 때 호적을 고친 것이다.
45년 해방은 스무살 청년인 그가 사업가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했다. 귀속재산이 된 목포상선 관리인에 선정돼 해운사업가로 입신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48년부터는 목포일보 사장으로 2년간 일했고, 51년3월에는 흥국해운의 정식 대표가 돼 만 서른이 되기 전 이미 목포의 성공한 사업가로 부상했다.
청년 김대중은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 중에 6·25를 맞았다. 그는 걸어서 20일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틀 만에 인민군에 의해 반동으로 몰려 목포 감옥에 2개월 수감 중 총살당할 뻔했으나 구사일생으로 감옥문을 깨고 탈출했다. 크게 일으킨 해운업마저 전쟁으로 망하자 정치의 중요성에 눈뜨게 됐다.
# 정치 입문과 좌절, 40대 기수
전쟁 직후인 54년 정치 지망생 김대중은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57년 7월 그는 김철규 신부 집전으로 중림동 노기남 대주교실에서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대부는 장면 박사이고, 영세명은 토머스 모어. 신앙은 그가 겪게 될 고난의 역정에서 의지가 되었고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게 했다.
뒷날 그가 입버릇처럼 "나는 선거운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듯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거푸 고배를 마셨다.
4·19 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61년 5월 인제 보선에서 처음 당선됐다. 그러나 금배지는커녕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났고, 쿠데타 세력은 국회에 못질을 했다. 의원선서도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의 정치 운명을 가른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악연은 여기서 싹튼다.
그는 군정기간 3차례나 투옥되는 등 야당 정치인으로 본격적인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것도 이때다. 그러던 중 장면 박사를 만나 민주당 신파의 맥을 잇게 됐다.
63년 7월 민주당 재건에 참여해 대변인으로 선임됐고, 6대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지략과 달변으로 각광 받게 됐다. 그는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의원이었고, 금융,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 다양한 상임위원회 활동을 펼치며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거침없이 설파했다. 본회의 최다 발언과 최장 시간 발언기록을 세우는 등 발군의 실력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은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여는 등 김대중 후보 낙선 전략을 집중적으로 펼쳤으나 그는 공화당 중진 김병삼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이 일로 그는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다.
68년 평생의 동지이자 숙적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신민당 원내총무로 지명되었으나 의원총회에서 부결됐고, 이어 치러진 경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69년부터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시작한 그는, 동시에 '지방자치 의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방자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부당한 관권의 개입으로 고배를 마시거나 곤경을 치렀던 개인적 경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71년 4월 7대 대선을 앞둔 신민당 대선 후보 지명경선에서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김영삼을 꺾는 역전극을 벌인다. 이때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내걸었던 '40대 기수론'의 기세는 야당 판도를 바꿨다.
김대중 후보는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거센 돌풍을 일으켰지만, 갖은 부정선거 논란 속에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불과 95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의 장정
'투표에서 지고, 개표에서 이긴' 선거로 혼쭐이 난 박정희 정권은 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민주화와 인권, 평화 통일을 택한 그에게 5년 반 동안 투옥과 3년여 망명, 6년 반의 가택연금이라는 시련이 이어졌다.
이후 뒤를 이은 군사정권들도 탄압을 멈추지 않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반정부 세력의 대표 인물로서, 민주화 투쟁의 선두라는 위상을 잃지 않았다. 역대 정권의 탄압은 그만큼 뛰어난 그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경계심에서 나온 것이다. 뛰어난 대중 연설과 판단력을 가진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통치자에게도 다루기 힘든 상대였던 셈이다.
신병 치료차 일본 도쿄에 가있던 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이 통과되자 그는 다음날 유신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어쩔 수 없는 '망명' 신세가 된다.
도쿄에 체류하던 73년 여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수장당할 위기에 빠지지만, 미국과 일본 개입으로 목숨을 구했다. 납치된 지 5일 만에 서울 자택으로 귀환한 그는 기자회견을 하고 납치 상황을 설명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76년 3월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 군부에 맞서 싸운다.
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권총으로 피살되면서 사면복권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하지만 80년 '서울의 봄'은 짧았다.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정치활동 중지 등을 담은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했다. 계엄사령부는 그와 예춘호 등을 사회 혼란 및 학생·노조 소요 조종혐의로 연행했다. 그리고 9월 그를 내란음모죄로 몰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케 한다.
그때 김 전 대통령은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그는 감옥에 들어갔을 때 교도소장의 특별 허락을 받아 옥사 앞 자그마한 화단에서 화초를 기르기 시작했다.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사는 그에게 매일 새롭게 자라나는 생명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 6월항쟁 촉발·직선제 쟁취 밑거름
국제 여론과 미국 정부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를 다시 한번 벗어났다. 대신 그 대가로 82년12월미국으로 건너가 버니지아 주 알렉산드리아의 월세 아파트에 일가족과 정착했다. 신병 치료라는 명목으로 가 2년2개월의 망명아닌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고국의 민주화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83년 6월 그는 뉴욕타임스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단식 지지 및 투쟁의 의의를 설명하는 기고문을 냈다. 그리고 국내에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 신민당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그의 계속된 민주화 투쟁은 87년 6월 항쟁을 촉발했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87년 7월 정부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관련자, 5·18 관련자 등 시국사범 2335명을 사면복권했다. 그해 9월8일 김 전 대통령은 16년 만에 광주를 방문하여 망월동 묘지에 참배하며 오열했다.
# 연이은 대선 패배와 정계은퇴
민주화 세력에게 호기를 제공한 87년 대선에서 양김은 반목으로 국민을 실망시켰다.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그는 평민당을 창당, 독자 출마했다. 결과는 노태우·김영삼에 이은 3위였다.
평민당은 88년 4·26 총선에서 '황색 돌풍'에 힘입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90년 김영삼·김종필과 노태우 대통령의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하면서 그는 제1야당 총재에서 소수 야당 총재로 전락했다. 그후 단식투쟁을 통해 이끌어낸 지방자치 선거에서 신민당이 거대 여당에 참패해 한때 퇴진 압력에 시달렸다. 그러나 91년 9월 역시 미니야당으로 이기택씨가 이끌던 민주당과 통합해 정권교체 재도전에 나섰다. 이듬해인 92년 14대 대선에서 후보로 나섰지만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세번째 대권 도전도 실패했다.
대선 패배 이튿날 그는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 93년 7월 귀국, 아태재단을 설립한 뒤 정치 재개를 준비한다.
# 정권교체·남북정상회담·노벨평화상
그는 95년 지방자체단체장 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연설원으로 등장하면서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이어 9월5일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동교동계 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가 되면서 정계 전면에 공식 복귀했다. 그의 정치 사상 가장 확실한 말바꾸기였고, 약속 파기였던 것이다.
96년 15대 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치고 100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79석으로 정치 연합을 모색하게 된다. 15대 개원과 함께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구축했다.
15대 대선 직전 그는 한밤중에 청구동 김종필 집을 방문, 불가능해 보이던 'DJP연합'을 성사시킴으로써 그를 옭아맨 지역당의 한계를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 김원기 전 국회의장, 원혜영 민주당 의원 등 국민통합추진회의 인사들을 끌어들여 대선 4수 장정에 나섰다.
그는 이전 역대 정권이 그에게 씌웠던 부정적 이미지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급진적이고 과격한 친북파', 심지어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깨기 위해 TV의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인기 그룹 'DJ DOC'의 노래를 딴 'DJ와 춤을' 부르기도 했다.
97년 12월18일 마침내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돼 헌정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를 해냈다. 그는 취임하자 자신을 그토록 핍박했던 독재자와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고속성장의 온갖 부작용으로 한국호는 침몰 위기에 몰려있었고,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연명하는 경제를 살려야 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위기국면을 역으로 이용,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경제병폐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국민은 '금 모으기' 등을 통해 그를 지지했다.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다만 이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수용한 신자유주는 이후 사회적 양극화 문제 등 한국사회에 상흔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평생의 숙원인 남북관계 개선에도 집중됐다. 98년 방한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의 실효성을 설파해 그를 설복했다.
햇볕정책을 앞세워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역사적인 6·15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해방 이후 처음으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해 12월 그는 한국인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아시아의 민주화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북화해정책을 펼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하고 범국민적 정보화 교육을 추진하여 한국을 세계 선두의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끌었다.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민주화 입법을 추진했다. 의료보험 등 '생산적 복지' 정책은 한국의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기말은 역대 대통령처럼 우울했다. 두 아들과 측근들이 줄줄이 비리에 연루돼 구속됐다. "나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부쩍 되뇐 것도 이 즈음이었다. 총재직 사퇴, 탈당 등 김영삼 전 대통령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반복했다.
# 퇴임 후 몰두한 남북과 민주주의
퇴임한 뒤 그는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문제에 천착했다. 대북 송금 특검으로 측근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구속되고, 자신의 성가가 폄훼되는 상황을 지켜봤다.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확대발전시킨 김대중평화센터를 통해 남북 화해 협력과 햇볕정책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또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남북 문제는 평화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의 면담 및 서신 교환, 중국 지도부 면담 등도 이 일환으로 이뤄졌다.
민주주의에 대한 천착도 계속됐다. 그는 2007년 11월 김대중평화센터를 통해 구금당한 버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 연금해제, 민주인사들의 정치활동 자유화 등 민주화 조치 단행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촉구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자신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으로, 햇볕정책은 '대북 퍼주기'로 격화되는 것을 목도한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경향신문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 사람들이 '잃어버린 10년'이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모든 잘못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촛불집회에 대해 "민주주의 발전의 극점이라고 할까, 최고 정점에 도달한 하나의 형태라고 생각한다"고 매김했다.
그를 결정적으로 어렵게 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서거였다.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심정"이라고 했던 김 전 대통령은 5월2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역 분향소에서 조문한 뒤 "국민은 지금 민주주의가 엄청나게 후퇴하고 서민경제가 전례 없이 빈부격차가 강화돼 어려움 속에 살고 있다. 남북관계가 초긴장 상태에 있어 (국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슬픈 것"이라고 사실상 마지막 통한의 대중연설을 했다.
필생의 업으로 쌓아온 민주주의와 남북평화가 후퇴하고 흔들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김 전 대통령은 끝내 몸져 누웠고,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 현대사의 거목은 여전히 이 땅의 민주와 평화를 향한 염원을 불사르며 하의도의 바다와 바람처럼 자연이 됐다.
< 최우규기자 banc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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