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년대가 서서히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머리를 삭발한채 칼같이 매운 바람이 골짜기로 몰아치는 해인사 원당암을 찾았다.
저녁무렵 몇가치 때는 장작불을 겨우 암자 방바닥의 냉기만 없애줄 뿐 웃풍탓으로 방안에서도 털모자를 쓰고, 가지고 온 옷을 겹겹이 껴입어도 추웠다. 볼펜을 들고 있으면 손이 곱아 얼얼했다. 그해 겨울 내가 겪은 산사의 기나긴 밤을 자연이 밤새 내는 여러 절규로 인해 신경이 곤두섰다. 밤새도록 겨울바람이 솔가지를 스치면서 쏴아하고 요란한 파도 소리를 냈다. 여기에 질세라 문풍지도 부우부우하면서 밤새 떨어댄다.
눈덮인 가야산 계곡 어디선가 끝을 길게 끌어대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마치 갈 곳 없고 먹을 것 없어 부르짖는 한맺힌 절규와도 같이 밤의 적막을 찢어내곤 했다.
시험문제로서의 가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개념만을 억지로 암기하자니 그것들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 사랑도 있을 리가 없었다. 게으른 성격의 나는 추위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시로 잠을 자곤 했다. 어떤 때는 몸이 땅속으로 잦아들 듯이 나른해서 움직이기가 싫었다. 식사를 알리는 목탁소리를 듣고서야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당시 그곳에는 비슷한 처지의 여러명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모이면 한결같이 활짝핀 얼굴이라곤 없다. 얼어붙어 번질거리는 길다랗게 네모진 밥상위의 시레기국은 항상 식어 있었다. 양념없이 절인 무에도 살얼음이 끼어 있곤 했다.
그해 겨울 어떤 밤이었다. 뒷방에서 공부하는 K씨에게 낮에 구해둔 떡을 먹자고 권했다. 떡은 구한지 몇시간 안되었는데도 돌같이 굳어 있었다. 우리 둘은 장작을 때는 암자의 아궁이로 갔다 돌덩이 같은 떡을 남은 불씨 가운데 밀어 넣었다. 밤하늘에는 얼어붙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피부속 깊숙이 파고 들었다. 백오십센티 가량의 작은 키로 왜소해 보이던 그는 내가 “굳은 떡을 먹자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인사를 하자 “아버지가 남의 산소를 봐주면서 얻은 논 네마지기로 가족들이 입에 풀칠을 해왔다”며 “어떤 나쁜 음식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은 없다”고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렇게 짧고 진실한 절규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가슴에 맺힌 골이 깊다고 느껴졌다. 가난하고 나이먹은 청년에게 고시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 당시 이웃방에는 J라는 사람이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가 건조한 웃음을 지으며 이런 얘기를 했다. 그는 오랜만에 서울의 집을 다녀왔다. 암자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입었던 누빈 옷을 입은 채였다. 그동안 몸에 따라다니던 결핵으로 하얗게 빛바랜 얼굴에 길게 자란 수염은 누가 봐도 정신이상의 의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가 종로길에서 우연히 옛날의 한 친구를 보았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양복에 활기넘치는 얼굴로 그는 예쁜 여자와 함께 토요일 한낮의 번화가를 활보하다라는 것이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주눅이 들어 옆의 골목으로 숨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의 허탈스러운 독백속에 아픈 세월의 성처를 다가오는 세월로 갈아끼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 역력했었다.
그런J씨와 가난했던 K씨는 현실을 벗어나야 할 저주로운 운명처럼 대하며 이를 악물고 밤을 새워 공부해 나갔다. 그해 겨울 나는 고시의 일차마저 떨어졌다. 본시험의 응시자격조차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볍게 통과했다.
그렇게 그해의 나머지가 가고 이듬해 봄이 왔다. 나는 새로 옮긴 서울 변두리의 독서실 나무의자 위에 놓여있던 신문에서 극도의 가난을 탄식했던 K씨가 마침내 합격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다음해 그토록 자신을 참담하게 여기던 J씨 역시 고시에 수석합격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웃는 표정으로 찍은 사진이 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시절 이후 십육년이 흘렀다. 어느덧 당시의 K씨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섞인 중년의 부장검사가 되어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장면이 가끔 신문의 사회면을 메운다. J씨 역시 알아주는 명변호사가 되어 허송세월한 듯한 지난날 수련기간보다 몇배 농도짙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소리가 바람결에 전해온다.
끈질긴 인내에 후회없는 인생을 엮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불행한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시절도 본인에겐 철길 낭떠러지였던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십대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외로움 또한 외로움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로는 그것들 때문에 실의를 넘어서서 암울한 나날이 계속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씨앗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편안하고 영악하고 실속있게 살수만은 없는 것이 삶이다. 인격이 하루아침에 완성이 되고 깊은 수양이 몇시간에 쌓여진다면 이 세상의 많은 문제가 해소되겠지만 그렇게 편리한 길은 우리에게 열려 있지 않다. 불안과 불확실한 삶을 붙잡고 넘어지기도 해야한다. 삶은 누리는게 아니라 견뎌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누구도 견뎌내지 않고 편안한 사람은 없다. 오늘의 고통을 견디어 이기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승리자가 된다.
듀마의 작품〈몽테크리스트 백작〉에 “불행을 견뎌낸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말이 있다. 가장 감동적인 자서전은 온갖 좌절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실패의 기록이지, 잘살다가 쉽게 성공했다라는 싱거운 거짓말이 아니다.
역시 가장 좋은 길은 가장 어려운 길이요, 시간이 걸리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차분히 그리고 서서히 가야 한다.